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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 뿌리내린 한국의 묵향: 고암문화유적지

etc. 김혜린 기자 2025.05.15


「SPACE(공간)」 2025년 5월호 (통권 690호)

 

 

고암 아카데미 전경 ©Lee Ungno Museum​

 

 

고암 서방 전경 ©Choi BoYoung​

 

 

작업 중인 이응노 ©Galerie Vazieux​

 

오늘날 프랑스 곳곳에는 현대미술의 거장 고암 이응노(1904~1989)가 남긴 예술혼이 스며 있다. 이응노가 프랑스에 거주하며 에꼴드 파리의 일원으로 남긴 수많은 작품들, 마지막 아틀리에가 있던 프레 생제르베 거리에 남겨진 벽화, 파리 동양미술학교에서 길러낸 수많은 제자들, 그리고 그의 사후 조성된 고암문화유적지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파리 근교 보쉬르센에 위치한 고암문화유적지는 이응노 사후, 그의 유지를 이어받은 아내 박인경과 아들 이융세에 의해 파리 동양미술학교의 강연 장소로 활용되기도 하며 프랑스에 한국 수묵화를 알리는 데 기여해왔다. 

 

화가 박인경과 이융세의 작업실 겸 거주 장소이기도 한 고암문화유적지는 19세기 중반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암 아뜰리에와 20세기 중후반 건축된 파리이응노레지던스, 고암 서방(1992), 박인경 화백 작업실(2008), 고암 아카데미(2014) 등 총 5개 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5개의 건축물은 멀리 센강이 내려다보이는 동산에 각각 떨어져 자리해 자연의 동세를 그대로 품고 있는 것이 그 특징이다. 그중 고암 서방은 한옥 명장 고 신영훈이 지은 것으로, 프랑스 최초의 한옥으로 유명하다. 한국에서 기와집을 지은 후 분해해 프랑스에서 재조립했으며, 대들보를 제외한 다른 부재는 모두 한국산 목재를 사용했다. 언덕의 경사면에 축조해, 센강과 보쉬르센의 자연 풍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건축물은 프랑스 건축가 장 미셸 빌모트가 설계한 고암 아카데미로, 먼저 지어진 고암 서방과의 연결고리 속에 만들어졌다. 빌모트는 고암 아카데미 설계 시 고암 서방이 목재로 이루어진 것을 고려해 시멘트와 철을 주요 자재로 사용했으며, 기와지붕에 영향을 받아 경사지붕을 만들었다. 상공에서 보면 십자의 모양을 띠고 있어 이응노가 추구한 조화와 통합의 미학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특징이다. ‘빌모트의 집’이라고도 불리는 박인경 화백 작업실은 원래 문지기의 집이었던 건물을 빌모트가 1년에 걸쳐 증축한 곳으로, 박인경이 거주하며 작업하는 공간이다. 이 밖에도 19세기 지어진 돌집인 고암 아뜰리에에는 화가로 활동 중인 이융세가 머물며 작업을 이어나가고 있으며, 기존에 차고였던 공간을 개조한 파리이응노레시던스는 대전 이응노 미술관과 연계해 2014년부터 젊은 작가들을 위한 레지던스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은 어떻게 국경을 넘어, 프랑스 예술계에 선명한 발자취를 남기게 되었을까? 1958년 이응노는 박인경, 이융세와 함께 한국전쟁 이후 혼란스러웠던 고국을 떠나 프랑스에 자리 잡게 된다. 당시 더 넓은 세계와 마주해 자신의 작품 세계를 확장하고자 한 이응노는 자신이 동양화를 그리기 때문에 오히려 중국이나 아시아가 아닌 서양으로 가야 한다고 그 뜻을 밝혔다고 한다. 당대 현대미술 최전선이었던 프랑스에서 서양 미술의 영향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이응노는 전통적인 재료인 먹과 한지를 비롯한 버려진 잡지 등의 여러 실험적인 재료들을 사용해 콜라주를 하는 등 다양한 기법을 통해 독자적인 세계를 확립한다. 이에 비해 박인경은 동양의 재료를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점묘법, 앵포르멜, 색면 추상 등 서구 미술의 기법을 적극적으로 흡수했다. 이러한 화풍은 1960년대에 들어 더욱 확장되어, 발묵, 드리핑, 푸어링, 데칼코마니 등의 기법에 먹을 접목함으로써 독자적인 수묵 추상 양식을 구축하게 된다. 두 작가의 작업은 당시 파리에 일던 앵포르멜을 비롯한 모더니즘 운동의 흐름 속에서도 자신들만의 형세를 유지하며, 한국적 추상의 세계를 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또한 이응노는 1964년 세르누시 미술관장 바딤 엘리세프와 함께 파리의 세르누쉬 미술관에 파리동양미술학교를 설립해 사군자, 서예, 산수화, 화조화 등을 가르치며 수많은 프랑스인 제자들을 배출해내기도 하는 등 프랑스 예술계에 한 획을 긋는다. 

 

이융세와 인연이 있는 파리의 갤러리 바지우는 2024년 이응노 탄생 120주년과 다가오는 2026년 박인경 화백의 백수를 잇는 시기를 기념하고자 올해 <이응노 박인경 2인전: 예술적 삶의 동행>을 기획했다. 아트 바젤 인 홍콩 2025에서 3월 26일부터 30일까지 진행된 이번 전시에서는 이응노와 박인경의 예술적 교감을 담아내며 남편 이응노에 비해 주목받지 못했던 1세대 여성화가 박인경의 예술 세계를 조명한다. 전시에서는 잘 알려진 이응노의 ‘군상’(1985)과 문자의 조형미를 다룬 ‘무제’(1979)를 비롯해 아직도 작품 활동을 이어 나가고 있는 박인경의 ‘새’(2024), ‘장미’(2024) 등의 작품을 다뤘다. 이응노가 힘 있는 필치를 통해 인간이나 문자의 형상과 조형적 미를 화폭에 담아내며 인간의 삶과 세계를 강렬하고 유쾌하게 표현한다면, 박인경은 꽃잎, 물방울, 광물 등 자연에서 영감을 받아 한지 위에 자연 염료와 먹을 사용해 자연을 시적 언어로 구현한다. 박인경의 작품 중 한지에 먹으로 쓴 글자로 그려낸 ‘고요한 아침’(2006)은 먹의 농담을 섬세하게 조절한 글자들을 통해 희미하게 밝아가는 아침을 표현한다. 또 빼곡히 써 내려간 글자들 위를 바다처럼 푸른 먹이 담뿍 적신 작품인 ‘무제’(2024)를 통해서는 서정적인 한국 수묵의 정수를 담아낸다.​ 

 

 

 

작업실에 앉아있는 박인경 ©Choi BoYoung 

 

 

이응노와 박인경의 사진 ©Choi Bo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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