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공간)」 2025년 12월호 (통권 697호)


‘에포케의 눈’ 스틸 이미지 ©Cheong Daein
지난 11월 15일부터 22일까지 정대인(스튜디오 푼크툼 대표)의 전시
전시장의 세 면을 활용해 삼면화처럼 구성한 전시는 ‘픽션의 구축’으로 시작된다. 다양한 형태의 은색 박스에 구멍을 뚫어놓은 ‘호기심의 캐비닛’ 내부에는 다양한 이미지들이 시적으로 병치되어 있다. 고대 그리스 기하학, 르네상스 광학, 19세기 기계식 드로잉 장치 등 시각에 관한 역사적 자료들을 다룬 드로잉과 정대인의 연구들은 파편적인 배열 속에서 시각적 변환을 만들어내며, 관람객에게 시각의 허구적 역사를 체험하도록 이끈다.
이어지는 ‘에포케▼1의 눈’은 챗GPT로 프롬프트를 작성하고 미드저니로 생성한 단편영화다. 영화는 미친 과학자에게 납치되어 가학적 실험 끝에 모든 감각을 잃고 시각만 남게 된 한 여성의 서사를 다룬다. 그녀는 구조된 이후 감각을 되찾지만, 평생 고정된 시야에 갇혀 살아온 탓에 시차를 인지하지 못하고 평면적인 세계 속에 머문다. 한 건축가는 가까운 것과 먼 것의 위상학적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그녀에게 원근과 3차원의 공간 개념을 가르치기 위해 평면을 그리게 하고, 기하학적 건물 입면을 그리게 하는 등 다양한 건축적 실험을 통해 그녀를 치료하려 애쓴다. 그러나 이 일련의 시도는 실패하고, 결국 건축가가 그녀의 시야를 역으로 체험하기 위해 ‘시각을 비트는’ 장치를 고안하게 되는 결말로 이어진다.영화에 이어 전시는 다시 ‘호기심의 캐비닛’으로 구현한 ‘시각의 구축’으로 이어진다.
‘시각의 구축’은 영화의 전제를 확장한 가상의 시각 기계들과 아나모포시스적 공간 재구성 모형, 엑소노메트릭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시의 큐레이터인 뱅상 푀 뒤발롱(윈저우-케인대학교 마이클 그레이브스 공공건축 칼리지 부교수)은 이는 “원근법을 코스모테크닉스로서 해체”하고, “다른 전통과 연결”하는 정대인의 시도라고 말한다. 또 이러한 픽션들이 “대안적 상상력”을 드러내며 “서구 회화의 고정된 시점을 겹쳐지고 접혀지는 공간적 파편들로 전환”한다고 해석한다.
전시와 연계된 강연에서는 정대인과 작가 이종건의 대담이 이어졌다. 정대인은 이번 전시가 자신의 지적인 호기심에서 출발했으며, 실제 건축으로까지의 확장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 이전에 이러한 치밀한 탐구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종건은 “이 작업은 건축가의 출발선이지, 여기에서 무엇을 발굴해냈냐, 천착하는 지점이 무엇이냐고 질문을 할 수는 없을 것 같다”며, “질문을 안고 가는 와중에 새로운 깨달음이 오고, 예기치 못했던 것을 만난다. 이것이 (건축가가) 살아가는 한 방식이자 삶의 총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그는 결국 이러한 작업이 정치·사회적 지각부터 과학과 비과학이 뒤섞인 총체적 현실 속에서, 건축가가 자신의 고유한 경험으로 세계를 돌파하고 사물들을 새롭게 발굴해 제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며, 이러한 ‘보는 주체’의 변형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모든 논의는 결국 공전에 그칠 것이라고 덧붙였다. 강연에서는 이 밖에도 역사, 철학, 문학, 영화 등을 넘나들며, 역사와 현상학, 건축에서의 시각에 대한 인식의 흐름, 1980년대생 동시대 건축가들이 마주한 현실적 고민 등에 대한 폭넓은 논의가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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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에포케’는 에드문트 후설의 용어에서 가져온 것으로, 의식을 관찰하기 위해 판단을 잠시 유보하고 멈춰서는 행위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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