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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주화된 상상력이 구성한 풍경: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적군의 언어〉

exhibition 이소운 기자 2026.01.30


「SPACE(공간)」 2026년 2월호 (통권 699호) 

 

‘상상의 종말 III’(2024) 설치 전경 ©Lee Sowoon 

 

‘상상의 종말 I’(2022) 설치 전경 ©Cho Sanghee 

 

 

미술관 건물을 하나의 거대한 조각적 생태계로 전환하는 전시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적군의 언어〉가 2025년 9월 3일부터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렸다. 이번 전시는 1995년 개관 예정이었던 아트선재센터 자리에 원래 있던 개인 주택에서 열린 첫 전시 〈싹〉 이후 30주년을 기념해 기획된 대규모 장소특정적 프로젝트로, 보존과 감상의 공간으로 작동해온 미술관의 질서를 전복하며 건물 전체를 아포칼립스적 풍경으로 전환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내부는 오랜 침식과 풍화를 겪은 지형처럼 보인다. 기존 출입구는 흙더미로 봉쇄되고, 화이트 큐브를 상징하던 흰 가벽은 철거되어 콘크리트 골조가 노출된 상태로 회귀했다. 또한 전시장의 온습도 제어장치는 의도적으로 중단되었고, 흙과 식물, 균, 시간의 개입으로 인간의 관리 시스템이 느슨해진 상태를 연출했다.

이러한 풍경에 ‘적군의 언어’라는 제목이 붙는다. 작가가 말하는 ‘적군’은 인간이 처음으로 마주하는 완전한 타자성을 가리킨다.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는 언어와 상징 체계를 홀로 발명한 존재가 아니며,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 등 타자와의 접촉 속에서 의미의 체계를 형성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전시의 아포칼립스적 풍경은 인간 중심의 질서가 더 이상 유일하지 않은 시간대를 가시화한 장면이다. 오늘날 그 타자는 인간의 사고와 언어를 벗어난 또 다른 생성자인 AI라는 존재로 다시 등장하며, 전시는 인간 중심 질서에 기반한 미술관의 형식 자체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그 조건을 체험하게 한다.

이 전시는 작가가 2022년부터 이어온 상상의 종말 연작을 중심으로 구성됐다. 미래의 유적지에서 발굴한 듯한 기괴한 형상의 조각들은 인간과 비인간, 자연과 기계가 얽힌 혼종적 세계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요구하는 듯하다. 우리는 이미 AI와 지식을 공유하며 의존의 단계로 들어섰지만, 동시에 그 관계가 인간성의 소멸을 예고하는 것일지 모른다는 불안을 안고 있다. 비야르 로하스는 이 모순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인간과 AI가 협력해 함께 의미를 만들어나가는 ‘협업적 상상’의 가능성으로 작업을 전개한다. 

상상의 종말은 작가가 개발한 ‘타임 엔진’에서 출발한다. 이는 비디오 게임 엔진과 AI를 기반으로 한 디지털 시뮬레이션 도구로, 변화하는 생명체와 건축, 생태계, 사회·정치적 조건과 물질 조건이 뒤섞인 평행 세계를 디지털 공간에 구축한 것이다. 수많은 이질적인 변수들이 개입하는 이 ‘합성 시스템’에서 입력된 파라미터와 생성된 형상 사이의 인과관계는 인간의 인식 방식으로는 해석되지 않는 블랙박스로 남는다. 작가는 이곳에서 생성된 가상 조각들을 다운로드해 현실 세계에 물리적 형태로 구현하는데, 이 조각들은 금속, 콘크리트, 플라스틱, 흙, 유리, 수지, 소금, 나무껍질, 자동차 부품 등 유기적·무기적 재료가 층층이 쌓인 복합체로, 인간과 기계의 노동이 중첩된 흔적을 드러낸다. 3층에서 전시는 디지털을 연상시키는 UV 그리드 막 안에 포획된, 타오르는 불로 마무리된다. 상상과 생성의 조건이 이미 인간의 손을 벗어나 알고리즘, 비인간적 지성과 얽혀 있음을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다. 불은 인간이 가장 오래 길들여온 힘이지만 이 낯선 창조물은 같은 의미에서의 도구가 아니며, 우리가 협업과 생존의 역학 자체를 새롭게 사유하도록 요구하는 불가피한 존재다. 

이번 전시는 미술관 건물에 대한 장소특정적 개입과 AI와의 협업을 통해 창조 행위가 인간 외부의 체계로 이행한 조건을 공간 전체에 걸쳐 드러내며, 2월 1일에 종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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