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공간)」 2025년 1월호 (통권 686호)

©Kyungsub Shin
김광수 스튜디오 케이웍스 대표 × 이종건 作家
내파와 포월
이종건(이): 김광수의 작업 전체를 기반으로 우리가 맞고 있는 건축적 상황에 대해 얘기를 해보자. 지금 여기의 세계에서 내가 느끼는 억압적 힘 중 하나는 조화다. 다문화의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는 우리 당대에서 중요한 것은 조화가 아니라 공존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의 대화 또한 각자가 각자로 존재할 그때에 비로소 가능하다. 문제는 각자가 각자의 자리에 머물러 있다는 개념이 개인주의와 맞닿는 데 있다. 신자유주의의 자기경영 주체로서의 개인은 모든 책임을 자신이 떠맡아야 한다. 신자유주의 내 개인의 내부성은 닫혀 있다는 것이다. 이 내부성은 건축적으로는 내외부 공간에 해당될 것이다. 내부성의 문제를 건축가는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김광수(김): 나 또한 이 근대 세계의 내부성 감옥에서 유배자처럼 살아야 되는 것인지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런데 예술에서는 아무리 세계가 내부화돼 있어도 외부를 여는 힘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매혹된다. 건축에도 이 힘이 있다고 생각했고, 외부에서 무언가를 끌어와 도움받으려 하기보다 닫힌 현실을 인정하고 내부에 천착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라 판단했다. 조화 혹은 종합이라는 명목으로 외부에 순응하고 닮아가려 하다 보면, 외부에서 주어지는 압력이 내부를 장악하게 된다. 나는 어떻게든 내부에 천착함으로써 오히려 미지의 세계와 그 외부성을 접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한 건축은 소설가 이인성이 ‘내파(內破)’라 말했 듯, 외부에서 폭발하는(explosive) 것이 아닌 안쪽에서 터지는(implosive) 건축일 것이다.
이: 내부성, 외부성과 관련해 건축에서 논할 수 있는 것은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신국립미술관(1968)이다. 모더니즘 건축이 지향했던 것은 투명성, 여기서는 유리로 전체를 덮어 주변을 향해 개방하는 것이고, 기술의 힘 덕분에 가능했다. 모더니즘 공간의 핵심은 무한한 자유, 곧 열림 속에 보호받는 존재다. 내부성의 제거라고 할 수 있겠다. 미로적 공간이 사라졌고 내외부 간의 대화와 변증이 없어졌다. 이 딜레마를 돌파하는 방식이 내파라면, 내파는 어떻게 외부, 곧 미지의 감각을 만들어내는가?

오괴헌(음악 아티스트 레지던시)(2024)
김: 그 개념을 건축에 실현하기가 정말 어렵다. 오괴헌에서 색이 둥둥 떠다니는 느낌을 받은 것처럼, 실제와 환상이 분간이 안 가는 상태에 점점 관심이 많아지고 있다. 중세 시대야말로 카톨릭을 중심으로 한 진짜 닫힌 사회였고 근대의 무한성 개념은 이러한 유한한 상황을 열어 젖혔다고 생각한다. 공존과 포용의 나라였던 스페인을 예로 들자면, 이슬람이 있을 당시 카톨릭뿐 아니라 유태인 등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면서 잘 지내다 레콩키스타 이후 종교재판을 400년 넘게 하면서 카톨릭으로 전부 내부화시키려 했다. 그때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라만차의 돈키호테』(1605)라는 최초의 근대소설이 나왔다. 소설을 보면 실제인지 농담인지 환상인지 구분이 안 된다. 이것이 세르반테스가 취할 수밖에 없었던 태도인 것이다. 직설하면 검열과 처벌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엘 그레코 그림도 장난인지 농담인지 모르겠는데 비극적이기도 희극적이기도 하다. 같은 시기에 쓰여진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햄릿』(1601)에도 유령의 등장으로 실제와 환상의 경계가 허물어지기도 하고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햄릿은 광인의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이 맥락에서 나는 하나의 세계상이 붕괴되는 매너리즘 시기에 관심이 많다. 연장선상에서 나는 근대가 끝났고 그다음에 온 것이 포스트모던이냐, 아니냐라는 논의는 크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철학자 김진석이 ‘포월(匍越)’이라는 용어를 쓰는 이유도 우리는 힘겹지만 근대를 건너뛰기보다는 힘겨움을 포함해 극복하며 넘어가는 방법밖에 없고, 이 방법이 닫힌 지금의 세계를 열 수 있는 더 좋은 선택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어떻게 근대를 포함하면서도 넘어갈 수 있는가?
김: 포복을 하면서, 근대를 변형 극복하며, 기우뚱한 균형을 유지하며, 계속 가는 것이다.
이: 현대 세계는 점점 비물질화, 사이버화, 비실제화, 추상화, 디지털화 돼간다. 점점 실재성이 사라진다. 과거 건축은 기둥과 벽의 두께, 곧 건축을 이루는 물질의 감각이 있었는데 지금은 종이처럼 그것이 사라졌다. 건축마저 실재성을 잃어버리는 형국이다. 몸 없는 영혼은 불가능하니, 건축은 건축이 감당해야 하는 무게, 질량, 덩어리, 신체성과 같은 질들을 보존해야 하지 않을까?
김: 요즘 비실재성의 반작용으로 질료감을 극대화한다거나 고인돌의 거석문화 혹은 야생성의 차원에서 원시적 감각 표현을 시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방식 또한 건축이 줄 수 있는 실재적 감각을 살려내려 노력하는 것이지만, 나는 이러한 현상에도 적지 않은 의문을 가지고 있기는 하다.

합천 영상테마파크휴게소(2014)
해학과 모더니즘 건축의 이면
이: 아르튀르 랭보가 “절대적으로 현대적이어야 한다”고 했듯, 퇴행과 향수로 현대를 달래고자 하는 것은 오히려 더 나쁜 일이지 않을까? 이쯤에서 우리가 짚어야 할 것은 건축은 근본적으로 프로젝트(project)고, 프로젝트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거기에는 건축가는 무언가를 꿈꾸어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내가 상상하는 도시는 지금 우리가 사는 도시보다 더 나을 거야’라는 상상과 믿음 말이다. 그것 없이 건축가라는 직능은 성립하기 힘들다. 달리 말해 건축은 어떤 상황에서도 유토피아적이어야 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에 따르면 인간에게서 유토피아적 희망, 본능, 욕구는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본질적 특성이다. 그런데 지금의 신자유주의의 닫힌 개인들의 세계에서 건축가는 어떤 유토피아를 상상할 수 있을까? 혹은 어떤 유토피아를 상상해야 하는가?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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