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공간)」 2025년 12월호 (통권 697호)

일죽목욕탕(2024)
DIALOGUE 조윤희 구보건축 대표 × 홍지학 충남대학교 교수 × 이소진 건축사사무소 리옹 대표 × 이중원 성균관대학교 교수 × 김정은 편집장 × 방유경 기자
일죽목욕탕
김정은: 이번 프레임 대담은 구보건축+홍지학(이하 구보)의 근작 네 곳을 대상으로 작업의 구체적 특징과 건축적 태도에 대해 짚는 한편, 함께 일하는 방식이나 사무소 운영까지 전반적으로 이야기해보고자 기획됐다. 조윤희(구보건축 대표)와 홍지학(충남대학교 교수)이 각각 롤모델로 꼽은 이소진(건축사사무소 리옹 대표)과 이중원(성균관대학교 교수)이 이번 프레임에 함께했는데, 답사 중 떠올랐던 질문이나 못다한 이야기를 이 자리에서 풀어놓으면 좋겠다. 먼저 외부인 출입이 쉽지 않아 실견하지 못한 일죽목욕탕(2024)에 대한 소개로 대화를 시작해보자.
조윤희: 일죽목욕탕은 광고기획사인 이노션의 사회공헌 사업으로 진행된 프로젝트다. 목욕탕은 농촌 지역에서 주민들이 건강을 회복하는 공간이자 중요한 커뮤니티 시설인데 의외로 안전사고에 취약하다. 주 이용층인 고령자의 경우 온습도 변화로 체온이나 혈압이 급변할 때 심혈관 계통의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히트쇼크’를 예방하고 ‘안전한 목욕탕’을 만들자는 취지로, 안성에서 26년째 영업 중인 한 목욕탕을 선정해 리모델링하는 사업에 참여하게 됐다.
이중원: 남탕과 여탕을 합쳐 60평 정도되는 한 층 공간을 리모델링했다고 들었다.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건축적 제안을 했나?
조윤희: 일반적으로 대중목욕탕은 탈의실과 욕탕으로 구분된다. 두 곳 모두 실내 공간이긴 하지만 낙후된 건물에 들어선 목욕탕의 경우 외풍이 심해 젖은 상태에서는 서늘하게 느껴지고, 두 공간 사이를 오갈 때는 급격한 온습도 차이를 느끼게 된다. 이러한 충격을 줄이기 위해 완충 공간인 ‘워밍업 존’을 제안했다. 복도에서 탈의실로, 탈의실에서 욕탕으로 이동할 때 서서히 온도를 높여 몸이 적응하도록 돕는 것이다. 워밍업 존을 중심으로 탈의실, 냉탕, 온탕, 열탕이 이어지도록 하고, 옷을 벗은 상태에서도 따뜻하게 다닐 수 있도록 바닥 난방을 도입했다.

일죽목욕탕(2024)
홍지학: 그 밖에도 안전을 위한 다양한 디테일을 제안했다. 목욕탕에 상주하는 세신사가 시설 내부에서 발생하는 사고를 바로 인지하도록 샤워부스 등 시설물의 높이를 전체적으로 1.2m 아래로 낮춰 시야를 확보하고, 탈수 증상을 예방하기 위해 탈의실과 욕탕 내부에 각각 음수대를 설치했다. 음수대 옆으로는 목욕 중 쉴 수 있는 벤치를 두었고 안전사고를 고려해 모든 모서리를 둥글게 처리했다. 워밍업 존의 바닥은 온돌을 깔고 구배도 기존보다 두 배 높여 배수와 건조가 빠르도록 했다. 실내는 사람들을 쉽게 식별할 수 있게 피부색과 대비되는 녹색 타일로 마감했는데, 미끄럼을 방지하고자 시중에 유통되는 다양한 녹색 타일 샘플에 비눗물을 뿌린 뒤 직접 밟아가면서 테스트를 거쳤다.
이소진: 이노션에서 기획한 프로젝트인데, 그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나?
조윤희: 매표부터 퇴실까지 사용자의 행동 패턴에 대해 구체적으로 상의하면서, 이노션에서는 사이니지 등 어르신들이 쉽게 인지할 수 있는 경험 디자인을 주로 맡았다. 목욕을 시작하기 전 건강 상태(혈압, 체온)를 체크할 수 있는 키오스크를 배치하고, 목욕탕 내부에는 10분마다 휴식 알람이 울리도록 했다. 로커 번호와 안내판 등 사이니지에도 큰 글자를 적용했다. 우리라면 사이니지를 이렇게 크게 만들 생각은 못했을 거다. (웃음)

일죽목욕탕(2024)
김정은: 기획 전문 집단과 일해본 소회는 어떤가? 일반적인 설계 프로세스와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조윤희: 발주처에서 사업 기획을 마친 상태에서 참여했기 때문에 작업이 수월했다. 발주처가 요구하는 ‘안전’의 기능적인 부분을 설계가 어떻게 지원해야 하는지 역할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노션에서 기획 업무를 맡아주니 설계 시간도 절약되고, 전문 집단과 의사결정을 함께하기 때문에 결과물에 대한 부담도 덜 수 있었다. 발주처에서 프로젝트를 적극적으로 홍보한 덕분에 레드닷 어워드에서도 수상했는데 전략적인 마케팅의 힘을 새삼 느꼈다. 역으로 건축가들이 이런 부분에 취약하다는 걸 느끼기도 했다.
홍지학: 이전에는 프로젝트를 우리 의지대로 끌고 가려는 성향이 강해 협업을 꺼리는 편이었다. 그런데 일죽목욕탕을 계기로 협업에 대해 유연하게 생각해도 된다는 걸 느꼈다. 요즘은 건축주들과 미팅할 때 건축가에게 다 의존하지 말고 외부 컨설팅이나 전문 기획자의 도움을 받아보라는 선택지를 제안하기도 한다. 나름 큰 변화다.
방유경: 그럼에도 작업을 진행하면서 어려운 점이 있었다면 무엇인가?
조윤희: 가장 힘든 건 빡빡한 일정이었다. 설계에 두 달 시공에 세 달, 총 5개월 만에 모든 걸 마쳐야 했다. 목욕탕의 위탁 운영자가 “목욕탕은 김장철이 대목이라 그전에 반드시 공사를 마쳐야 한다”고 해서 일정을 더 미룰 수도 없었다. 좋은 취지에 공감해 참여했을 뿐인데, 프로젝트와 얽힌 여러 사람들의 니즈에 맞춰 진행해가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김정은: 공공성이 짙은 프로젝트일수록 다양한 주체들 사이에서 조정하는 역할이 중요한 것 같다.
이소진: 조정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본인의 스트레스 지수가 높아지지 않아야 한다. 공공 프로젝트를 지속적으로 하는 건축가들을 보면 많은 경우 무덤덤할 줄 알더라. 웬만해서는 쉽게 상처받지 않는 것이다. 스스로 스트레스를 받는 성향이라면 공공 프로젝트를 오래 지속하기 벅차다.

신트리공원 통합 실내놀이터(2025) ©Roh Kyung
신트리공원 통합 실내놀이터
김정은: 또 다른 공공 프로젝트인 신트리공원 통합 실내놀이터(2025, 이하 신트리 놀이터)로 넘어가보자. 설계공모를 통해 진행됐는데 조성되기까지 우여곡절이 있었다고 들었다.
홍지학: 신트리 놀이터는 양천구에서 진행하던 공원 리모델링 사업의 일부였다. 공원 전체를 리모델링하는 마스터플랜 원안에 카페 자리가 정해져 있었다. 공원 계획이 원형을 콘셉트로 했기 때문에 건물도 원형으로 설계해 달라고 요청을 받아 처음부터 원형으로 디자인했다. 그런데 공원 마스터플랜이 축소되면서 우리가 설계한 건물만 뜬금없이 남은 상태가 됐다.
이소진: 계획했던 마스터플랜이 실현되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현재 모습도 공원으로서 충분히 좋아 보인다. 건물이 군더더기 없이 단순하게 들어서서 오히려 잘 어울리는 것도 같고.
이중원: 원형으로 설계할 당시 주안점은 무엇이었나? 마스터플랜이 축소된 이후 설계에서 변경된 부분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조윤희: 연의생태학습관(2022, 「SPACE(공간)」 677호 참고) 때와 마찬가지로 공원 안에 지어지는 건물이 어떻게 공원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하느냐 하는 문제가 핵심이었다. 설계 소묘에는 ‘입면 없는 건축’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는데, 사방으로 열린 잔디밭 위에 지어지기 때문에 일정한 방향성을 갖지 않는 원형이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마스터플랜 원안에 있던 잔디마당 쪽으로 큰 파노라마 창을 두고 그 앞에 넓은 처마를 내어 건물의 내외부가 공원과 자연스레 이어지는 풍경을 상상하면서 말이다.
홍지학: 공원 계획이 취소되면서 기존 마스터플랜에서 계획했던 녹지나 시설물은 사라졌지만, 우리가 설계한 건물이 공원의 기존 조경과 크게 충돌하는 부분은 없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형상은 그대로 유지하되 현재 공원 동선에 맞춰 원형 배치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실내에서 보이는 장면과 중앙 통로를 활용해 어떻게 공원과 연결점을 만들지 고민했다.

신트리공원 통합 실내놀이터(2025) 실내놀이터 중정 ©Roh Kyung
이중원: 형태적인 측면에서 보면 평면상 중정, 건물 외벽, 처마선까지 원 세 개로 설계됐다. 셋 중에서 중정만 편심으로 치우친 것은 어떤 의도였나?
홍지학: 처음부터 원형으로 결정된 상태였기에 그 안에서 이리저리 실들을 배치해봤다. 원이 아닌 다른 형태 언어로는 쉽게 풀리지 않더라. 그래서 도넛처럼 가운데 공간을 뚫어 밴드 형태로 빙 돌아가는 공간을 구상했는데, 막상 건물과 중정의 중심을 맞추니 한 바퀴 도는 루틴이 지루하게 다가왔다. 필요 실들의 면적도 공간마다 다른데, 폭이 일정한 상태에서 배분하면서 데드스페이스도 생겼고. 그래서 중정 원의 중심을 한쪽으로 이동했더니, 실내 공간의 폭이 다양해지면서 기능에 맞춰 실을 나누는 데도 효과적이었다.
이중원: 중정에 다른 형태는 고려하지 않고 원으로만 해결하려고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홍지학: 작은 규모의 프로젝트라 새로운 체계가 들어오면 복잡해질 것 같았다. 단순한 것을 선호하는 편이라 너무 많은 요소나 체계가 뒤섞이기보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어휘로 잘 풀리는 걸 좋아한다. 구상할 때부터 구조를 동시에 생각했다. 중정의 원에서 보가 나오고 이를 건물 끝에서 기둥으로 받치는 방법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공원 안에서 우리 건물이 통과하는 동선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원형 중정을 끼고 돌아나가는 것을 생각했다.

신트리공원 통합 실내놀이터(2025) ©Roh Kyung
이중원: 편심으로 배치하면 내벽과 만나는 부분에 다양한 예각이 나올 수밖에 없다. 건물의 체계는 단순한데 오히려 시공은 복잡해지는 상황이 아닌가?
홍지학: 날카로운 지적인데, 그게 우리 단점이다. (웃음) 설계의 지향점은 단순하고 명쾌한 건데 공력이 부족해서인지 시공자들은 대부분 “겉으로 보기에는 안 그런데 실제로 시공해 보면 너무 복잡하다”고 하더라. 공사 현장에서도 명쾌하게 읽히는 건물을 설계하는 것이 우리의 중요한 숙제다.
조윤희: 편심을 채택하면서 공간의 기능적 필요에 대응할 수 있었던 건 맞지만 그로 인해 이형이 생기면서 평면의 효율성이 떨어지는 상황이 발생했다. 하지만 우리 나름대로는 공원 안에 있는 파빌리온과 같은 건물이기 때문에 설계적 가치에 무게를 둬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면적으로 수익을 산출하는 꽉 짜여진 프로젝트가 아니기 때문에 약간의 비효율을 감수하더라도 건축의 논리적 정합성을 추구하고자 했던 거다.
이소진: 바로 그 지점이 이런 프로젝트가 지닌 가장 큰 장점이자 흥미로운 부분인 것 같다. 공원 안에 위치한다는 점이 설계를 정당화할 수 있는 굉장히 좋은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조윤희: ‘정당화’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건축의 다양성 측면에서도 긍정적인 요소라고 생각해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효율을 추구하는 건축도 필요하지만, 정반대의 건축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공원시설 같은 공공 건축에서 제공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저마다 다양한 상황 속에서 만들어진 건축의 가치가 조금씩 다르다는 걸 드러내는 일도 의미가 있다고 본다.

신트리공원 통합 실내놀이터(2025) ©Roh Kyung
추상성과 구체성
이중원: 일죽목욕탕도 그렇고 구보의 원칙에서 휴머니즘이 느껴진다. 사람을 배려하는 아주 구체적인 감각이라고 할까. 그런데 방금 언급한 ‘논리적 정합성’은 꽤 추상적으로 다가온다. 언제 추상성이 개입되고, 언제 구체성이 개입되는가?
조윤희: 우리는 기본적으로 추상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인 것 같다. 둘 중 무엇이 더 중요하다기보다 추상성이 없으면 스스로 건축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추상성을 갖고 있지만 그것이 리얼리티를 압도하지 않는 것. 타협이 됐는지도 모르게 현실에 잘 녹아든 추상성. 그것이 내가 추구하는 바다. 우리 같은 전문가들에게 흥미를 끌면서도 동시에 일반 사람들이 봤을 때 불편하거나 불쾌하지 않도록 하려면 ‘잘해야’ 한다. 우리가 좇는 가치를 위해 도시에 민폐를 끼치면 안 되지 않나. 그걸 위해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면 몸으로 체득하며 연륜을 쌓아야 해서 건축이 참 어려운 것 같다.
방유경: 그런 측면에서 구보의 근작 가운데 신트리 놀이터가 가장 추상적인 작업으로 읽혔다. ‘구보가 이런 것도 할 수 있다’ 하는 의지도 엿보이고. 중정을 둘러싼 흰 벽을 보면서 이 안에 다른 세상을 구현하려 했다는 느낌도 들었다.

신트리공원 통합 실내놀이터(2025) ©Roh Kyung
김정은: 공원에서 유일하게 내향적인 공간이다. 창도 많이 내지 않고 중앙에 배롱나무 한 그루만 남겨두어 정적이면서도 시적인 공간을 형성했다.
조윤희: 사방이 공원으로 트여 있었기 때문에 바깥을 바라보는 창을 파노라마 뷰로 활짝 열고, 중정 하나만큼은 내밀한 공간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전작인 연의생태학습관은 추상성에 대한 우리 의지가 잘 구현된 사례다. 우리가 생각하는 구조, 공간, 재료와 같은 요소들이 정합성 아래에서 통합적으로 설계됐는데 공원이라서 좀 더 편한 마음으로 설계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건축주 맞춤형 건축가다. 건축주가 ‘붉은 벽돌이 싫다’고 하면 ‘검은 벽돌’은 어떠냐고 제안하는 스타일이다. (웃음) 나에게 중요하지 않은 것들은 잘 포기하고 내가 가져갈 수 있는 게 무엇인지 계속 고민하는 것이다. 추상성과 구체성 사이에서.
홍지학: 대화하다 보니 민간과 공공을 대할 때 작업 태도에도 차이가 있다는 생각도 든다. 민간에서 우리 아이디어를 실현하려면 건축주를 집요하게 설득해야 하는데, 우리에겐 아직 그런 능력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사용자나 건축주와 사사건건 싸우기보다는 그들의 의견을 가급적 존중하려고 한다. 반대로 공공은 그에 비해 자유도가 있다고 느낀다. 발주처에서는 큰 문제없이 정해진 기간과 예산 안에서 완공되는지 여부에 더 관심을 갖지 않나. 그래서 공공에서 추상성 쪽으로 간다면, 민간에서는 보다 사용자에 밀착해 구체성으로 가는, 이중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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