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공간)」 2025년 11월호 (통권 696호)

소프트 셸프(브라이언 브러시 공동작업, 2008) ©Lee Hokyung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의 건축 교육과 실무에서는 사이트의 맥락(context)을 읽고 그것에 반응하는 것이 절대적인 원칙처럼 여겨진다. 형태적 의도를 조금이라도 과하게 드러내면 가차 없는 비판을 받는다. 효율성과 경제성이 아래를 굳게 떠받치고, 그 위로 역사적·문화적·사회적 조건은 물론 법규와 구조 같은 외부의 제약이 겹겹이 쌓인다. 이러한 요소들을 설계 과정에 충실히 반영하여 다듬어진 ‘매스’만이 건축적 타당성을 인정받는 분위기다. 이러한 태도는 건축을 사회적 산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일정 부분 타당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실험의 가능성을 제한한다. 모든 건축이 그렇게 작동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외부의 조건에 종속되지 않고, 내부의 논리와 질서에 따라 자율적으로 형성되는 건축 역시 존재할 수 있다. 이는 맥락을 부정하려는 태도가 아니라, 건축의 생성 원리를 외부의 틀 바깥에서 다시 사고하려는 시도다. 때로는 이러한 접근이 다소 낯설고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바로 그 불균질한 시도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형성된다. 익숙한 틀에서 벗어난 건축은 종종 이상하다는 평가를 받지만, 그 이상함을 구체화하는 단단함은 실험의 완성도를 높이고 건축의 밀도를 깊게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일련의 작업들은 다섯 가지 설계 접근으로 정리될 수 있다. 연산적 사고, 제작 기술, 과정, 재료, 그리고 전통에 대한 탐구는 각기 다른 층위를 다루지만, 결국 하나의 사고 체계로 수렴하며, 건축을 외부의 요구에 반응하는 결과물이 아니라 스스로의 구조를 통해 세계를 새롭게 조직하는 행위로 확장한다.

다이내믹 퍼포먼스 오브 네이처 (브라이언 브러시 공동작업, 2011)

의자 파빌리온(브라이언 브러시 공동작업, 2012)
연산적 사고
연산적 사고(computational thinking)는 수학적 연산을 포함한 논리 체계의 구축을 설계 과정의 중심에 두는 태도이다. 외부의 맥락이나 조건에 의존하지 않고, 내부의 규칙과 관계가 스스로 형태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중요하게 본다. 여기서 ‘연산’은 단순한 계산이 아니라, 여러 변수들이 상호작용하며 일정한 질서를 만들어내는 사고의 방식이다. 이 행위는 여러 가지 툴에서 일어날 수 있는데 컴퓨터, 계산기, 노트, 머리 속 등 어떤 모습으로도 이루어진다. 형태는 미리 정해진 결과가 아니라, 조건과 규칙이 반복적으로 작동하는 과정 속에서 발생한다. 건축가는 도면을 완성하는 사람이 아니라, 작동의 조건을 설정하고 그 과정을 관찰하며 수정하는 역할을 맡는다. 예를 들어, 위상한옥(2025)은 변화하는 프롬프트, 그에 따라 끊임없이 생성되는 단면들과 선별된 결합 덩어리, 그리고 산업용 로봇팔의 가공 방식 사이에서 최적화된 조건에 맞춰 형태와 제작법이 동시에 결정된다. 이런 사고의 전환은 건축을 완성된 결과물로 보지 않고, 지속적으로 변화하며 확장되는 하나의 시스템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이러한 접근은 파라메트릭 디자인이나 BIM처럼 디지털 툴을 보조적으로 활용하는 수준을 넘어, 설계의 사고 과정 자체를 구조화하는 방법론으로 발전한다.
작업의 초기에는 실시간 데이터 시각화나 알고리즘 모델링의 제작 방식을 통해 가능성을 실험했지만, 지금은 도구의 기능적 측면은 물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사고의 흐름에 집중한다. 연산적 사고는 계산의 기술이 아니라 관계를 정의하고, 변수를 조정하며, 규칙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는 사고의 틀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건축은 더 이상 고정된 산출물이 아니라, 내부의 질서가 외형으로 드러나는 열린 시스템으로 이해된다. 최근에는 AI의 등장이 이러한 흐름을 한 단계 더 확장시키고 있다.

필라먼트 마인드(브라이언 브러시 공동작업, 2013) ©David Agnello

무드맵(브라이언 브러시 공동작업, 2013)

자연의 역동적 움직임(2014)
고도화된 제작 기술
연산적 사고를 거친 결과물은 일반적으로, 혹은 의도적으로 복잡하고 과장된 형태를 띠게 된다. 이를 실제 공간으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제작 방법에 대한 연구가 필연적으로 개입된다. 제작 기술은 단순히 형태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사고가 물질로 번역되는 과정이며, 연산적 사고방식과 더불어 대부분의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축으로 작동한다. 산업용 로봇팔, CNC 절삭, 3D 프린팅과 같은 도구들은 효율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사고의 과정을 시각화하고 검증하는 실험장치로 기능한다. 제작은 설계 이후의 공정이 아니라 설계 과정의 일부로 포함되어, 초기 개념 단계부터 병렬적으로 진행되며 새로운 형태의 질서를 현실 속에 구축한다. 이러한 접근은 최신 기술을 단순히 자동화나 정밀화의 수단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손과 사고, 그리고 기술적 장비가 함께 작동하는 새로운 감각 체계를 제시한다. 로봇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사고를 확장하고 실험의 범위를 넓히는 도구로 기능한다. 제작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오류와 편차는 결함이 아니라 실험의 일부로 받아들여지며, 이러한 변수를 제어하는 것을 목표로 서서히 발전한다. 기술은 완결된 건축을 생산하기보다, 미완성의 상태를 유지하며 지속적인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 고도화된 제작 기술은 단지 정밀한 결과를 생산하는 능력이 아니라, 사고와 물질이 서로를 끊임없이 갱신하는 개방적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이다.

흩어지다(2015)

융합(2017)
프로세스 기반 접근
새로운 개념이나 기술을 다루는 작업에서는 설계 프로세스 자체를 설계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많은 경우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방식을 활용하기 때문에, 설계의 핵심은 무엇을 만들 것인가보다 어떻게 사고가 전개되고 어떤 방식으로 물리적 변환이 일어나는가이다. 밀웜이 플라스틱을 먹는다는 인터넷 기사의 내용은, 벌레가 플라스틱을 갉는 모습을 보여주는 초소형 프로젝트 애벌레 건축(2020)에서 처음 구체화됐다. 이후 산업용 로봇팔과 열선 가공을 결합해 완성한 분해농장_계단(2022, 「SPACE(공간)」 664호 참고)이 건축의 한 부분으로 완성됐고, 보다 적극적으로 건축 폐기물의 문제를 푸는 분해의 적층(2025)으로 그 형태와 규모를 바꿔가며 진화했다. 이처럼 프로세스 기반 접근은 단순한 절차나 순서가 아니라 사고의 구조를 형성하는 장치이며, 그 구조 안에서 기술·재료·공간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접근법은 결국 하나의 흐름으로 ‘이야기(narrative)’를 만들어낸다고 볼 수 있다. 이야기는 설계의 출발점이자 과정을 연결하는 장치로, 논리적 단계와 감각적 흐름을 동시에 조직한다. 즉 건축의 프로세스는 하나의 이야기처럼 읽히며, 각 단계는 원인과 결과가 아닌 의미의 축적 과정으로 작동한다.
이러한 접근은 ‘사변(speculation)’이라는 생각의 방식과도 연결된다. 사변은 단순히 머릿속에서 상상하는 일이 아니라, 실제 실험을 통해 생각을 확인하고 확장하는 과정이다. 설계자는 예측할 수 없는 조건을 일부러 만들어놓고, 그 안에서 어떤 결과가 생기는지를 관찰한다. 이렇게 얻은 과정의 흐름 자체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된다. 예를 들어, 알고리즘이 만든 형태나 재료의 변화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질서를 찾아내는 일은 사변적 실천이라 할 수 있다. 이런 태도는 완벽한 결과를 목표로 하기보다,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을 실험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고가 물질로 바뀌는 그 불확실한 순간에 창작의 가능성이 생기며, 건축은 더 이상 계획된 형태를 실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생각과 실험이 함께 자라나는 열린 구조로 변한다.

윙타워(2017)

면목119안전센터(2017) ©Kyungsub Shin
지속 가능한 재료
현대건축의 절대적 가치인 효율성을 구현하는 재료는 콘크리트와 철이다. 지난 100여 년 동안 (우리나라의 경우 30여 년이 더 줄 것이다) 이 두 재료는 절대적인 건축의 전제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우리가 당연하게 믿어온 가치는 언제든지, 특히 환경과 관련된 영역에서는 순식간에 뒤바뀔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건축에서의 지속가능성은 단순히 에너지 효율이나 재활용의 문제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재료의 생애를 다시 설계하고, 물질의 변화와 소멸을 시간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사고의 전환이다. 균사체와 같은 생분해성 소재처럼 스스로 변형되고 분해되는 재료는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자연의 변수를 설계 안으로 끌어들인다. 이러한 재료를 다룬다는 것은 완결된 형태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살아 있는 시스템을 조율하는 일에 가깝다. 건축은 더 이상 고정된 물체가 아니라, 시간 속에서 성장하고 퇴화하며 끊임없이 변하는 존재로 작동한다. 재료는 형태를 구성하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과정을 이끄는 주체가 된다.
이러한 시도는 첨단 기술 중심의 경쟁 속에서 후발주자로서 선택한 전략적 접근이기도 하다. 컴퓨테이션과 최신 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더라도, 단순한 정밀함이나 속도의 경쟁만으로는 해외의 선진 연구자들을 따라잡기 어렵다. 그렇기에 친환경 재료라는 소재는 기술적 한계를 보완하고, 프로세스를 강화하며, 건축의 이야기를 한층 깊게 만드는 방법이 된다. 무엇보다 지속 가능한 재료는 인류 공통의 문제(환경과 생태적 지속성)에 대한 가장 근본적이면서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접근이기도 하다.
(왼쪽) 뿌리벤치(2018), (오른쪽) 바람모양(2019)
(왼쪽) 파도파빌리온(2020), (오른쪽) 공포가변(2021)
전통의 재해석
지속 가능한 재료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전통 역시 컴퓨테이션과 결합될 수 있는 또 하나의 전략적 축이다. 서구의 기술 중심적 건축 연구 속에서 결코 등장하지 않는 주제이자, 우리 고유의 사고 체계에서 출발한 논리적 기반이다. 서구 중심으로 기술이 압도적인 속도로 발전하는 분야에서, 한국의 전통을 연구한다는 일은 역설적으로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자유를 얻는 일이다. 아무도 경쟁적으로 다루지 않는 영역이기에, 실험의 속도를 스스로 정할 수 있다. 건축의 내부 질서를 탐구하는 일은 결국 전통의 구조적 사고로 이어진다. 전통은 단순히 과거의 형식이나 미학을 복원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 안에 내재된 관계의 원리를 오늘의 언어로 다시 구성하는 일이다. 목구조의 결구 방식, 한옥의 비례 체계, 재료의 물성 속에는 이미 정교한 수학적 질서와 알고리즘적 사고가 존재한다. 이를 현대의 기술과 연산적 사고로 다시 읽어내는 전통의 재해석은, 전통을 과거의 기억에서 미래의 실험으로 전환시키는 일이다.
이 분야에서 전통을 다루는 일은 복원보다 변형에 가깝다. 디지털 제작 기술은 과거의 구조적 지혜를 새로운 재료와 환경 속에서 다시 실험하게 한다. 전통은 고정된 정체성이 아니라, 시간과 기술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갱신되는 개방적 체계다. 과거와 현재, 물질과 데이터, 장인적 손끝과 알고리즘적 계산이 충돌하고 중첩되는 그 지점에서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진다. 이때 전통은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시간의 변주로 작동하며, 건축은 그 리듬 속에서 시대의 감각을 새롭게 해석하게 된다.
(왼쪽) 플라워링(2022), (오른쪽) 분해농장_계단(2022)

맞춤집(2023)

이끼기둥(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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