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공간)」 2026년 3월호 (통권 700호)
대지의 역사
모든 대지에는 역사가 있다. 대부분의 경우 주인이 바뀌면 지워져 버리거나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대상이 되긴 하지만. 그런데 2023년부터 2025년 사이 우리가 설계하여 지어진 프로젝트 모두가 특정 대지에서 오랜 시간 건물을 운영해온 주체를 위한 건물들이었다. 이들 중 절반 이상은 설계공모를 통해 당선된 경우로, 맥락에 관심을 가져도 될 만한 프로젝트에서 우리가 강세를 보였다고 할 수 있겠다.
나(이 글에서 ‘나’는 김진휴와 남호진을 의미한다)는 모든 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또한 모두가 아름답다고 동의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별로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던 것들 중에도 오래 보고 생각하다 보면 아름답다고 느끼게 되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경우가 좀 더 흥미롭다.
오래된 모든 것을 존중할 수는 없다. 버릴 것을 잘 버리는 것도 미덕이다. 나는 변화를 좋아한다. 존중할 만하지 않았던 것을 굳이 존중하거나, 존중받아 마땅한 것을 존중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판단이 공감을 얻게 될 때 프로젝트는 강력한 추진력을 얻는다.
우리는 2023년의 시작과 동시에 첫 프로젝트로 인천국제공항 화물터미널 내에 근로자 편의시설 두 동(카고 라운지)을 짓는 설계공모에 도전했다. 수천 제곱미터의 주차장 부지 한가운데에 500제곱미터의 건축물을 만드는 일이었다. 화물터미널의 주축을 이루는 물류 창고는 시각적 아름다움을 목표로 지어진 것은 아니다. 또한 지역적 정체성을 논하기엔 이 창고들은 어느 나라에 가나 똑같이 생겼다. 그래서 우리는 존중할 맥락이 없는 대지에 자유로운 형태의 건물을 설계하는 것을 즐길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 예상은 틀렸다. 그리는 족족 생뚱맞고 공허했다.
보다 보니 아름다운 것 같기도 했다. 간척으로 조성된 광활한 인공 대지. 반듯하게 재단된 필지에 들어선 거대한 물류 창고들. 장스팬 구조 아래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무수히 많은 박스가 옮겨 다닌다. 단층의 깊은 평면은 천창을 필요로 하고, 그물 같은 스페이스 프레임 사이로 하얀 빛이 떨어진다. 허세 없이 고도화된 건축, 기념비가 아닌 것에서 발견하는 기념비적 스케일은 약간 감동적이었다. 물류 창고에서 발견한 미(美)는 우리가 제안한 편의시설의 유전자가 되었다. 네모남. 가늚. 가벼움. 성김. 높음. 큼. 기술지향. 효율. 몇 가지 특성만으로 건축이 완성되지는 않지만, 이 건축은 화물터미널 역사(歷史)의 한 연장선상에 무사히 안착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 제안은 심사위원들의 공감을 이끌어냈고, 그렇게 당선된 안이 건물로 지어지게 되었다.
이때의 경험은 우리가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들에 관심을 갖게 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읽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대상이 가장 중요한 단서가 되었고, 우리가 만드는 건축의 이야기는 더 흥미로워졌다.
대지의 역사나 맥락을 읽는 것이 반드시 현황과의 조화 또는 현황의 모방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의도적 부조화, 무관심, 거리 두기도 건축가의 선택이다. 읽지 않고 만든 부조화와 읽고 만든 부조화에 차이가 있다면 한 건축가가 만들어내는 건축의 의미를 바깥까지 확장하게 된다는 점이다. 여기서 바깥은 건물이 자리를 차지하는 지표면의 외부, 건물이 설계되고 지어지는 제한된 시간의 전과 후, 독립된 작업으로 떼어놓고 비평할 수 있는 내재적 가치의 바깥 모두를 의미한다.
형태와 무형태
학교에서 형태주의를 배웠다. 형태에 의미를 담으면 서로 다른 말과 글을 쓰는 나라의 사람도 이해하게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인천국제공항 카고 라운지의 한 동은 중정형, 나머지 한 동은 바람개비형 매스로 만들었다. 거의 동일한 조건을 가진 대지에 서로 상반되는 형태의 건축물을 배치한 것은, 철골 캐노피 아래의 매스는 무슨 형태여도 상관이 없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싶었기 때문이다.현대백화점 본점 발렛라운지의 주인공은 추상적인 면이다. 시대나 지역을 떠올리기 어려운 희고 연속적인 면이다. 본점의 건축을 압도하고 싶지 않았고, 압도되고 싶지도 않았다.
호암 카페는 이미 존재하던 옹벽 뒤에 붙어 땅속을 점유한다. 새로 만들어진 부분은 밖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한동안 이보다 더 무(無)형태의 건축을 만들기는 어려울 것 같다.
세 프로젝트 모두 형태로 이야기하기보다는 무형태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들을 연작으로 의식했던 것은 아니다. 우리로서는 대지의 역사를 진지하게 바라보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고, 강한 형태를 사용해 기존에 있던 것들과 관계를 만들어낸다는 생각을 하기는 어려웠다. 덜어냈을 때 더 강해진다고 생각했다.
무형태는 열린 결말의 건축을 가능케 한다. 하나의 분명하고도 치우친 형태로 건물을 완성했을 때에는 그 이상을 상상하기가 어렵다. 호암 카페의 외곽선이 어떤 형태인지는 평면도를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대칭이 맞지 않으며, 어느 코너도 정렬되지 않는다. 지금 만들어져 있는 부분에 다른 공간이 덧붙여진대도 이 건축의 장점 중 무엇 하나 훼손되지 않는다. (실제로 일어난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가능성을 포용할 수 있는 헐렁한 상태를 좋아했다.
인천국제공항 카고 라운지의 박스들이 “무엇도 될 수 있는 것들 중 하나”라는 의미를 가지게 됨으로써, 우리는 다른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다. 캐노피 아래에 박스형 건축이 아니라 삼각형이나 원형의 건축이 놓여야 했다면, 어떤 공간이 만들어졌을까 생각해볼 수 있다. 건물이 완공된 후에도 이 프로젝트는 우리의 도면 속에 살아 있다.

구조와 표현
나는 더 나은 구조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목구조가 철근콘크리트 구조보다 우월하다거나 철골구조가 중목구조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요즘 목구조는 탄소발자국이 적은 구조 형식으로 각광받고 있다. 그러나 목구조가 화재나 습기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는 없다. 비슷한 방식으로 다른 구조 형식들에 대해서도 치명적인 장점과 단점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장스팬이 보통의 스팬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캔틸레버 보가 단순 지지보보다 더 멋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구조의 효율성은 객관적으로 정의할 수 없다. 더 넓은 공간을 비우기 위해서 더 크고 비싸고 만들기 어려운 구조체를 도입하는 것이 효율적인지 아니면 비효율적인지에 대해 항상 쉬운 답을 내릴 수는 없다.
구조가 나의 의도에 더 잘 부합되게 만드는 방법은 있다. 우리의 프로젝트에서 구조는 공간에서 사라져야 하는 도구인 경우가 있고(현대백화점 본점 발렛라운지), 구조 형식 자체가 메인 모티프가 되는 경우도 있으며(인천국제공항 카고 라운지), 구조체의 형태가 공간에 은은하게 의미를 흘리는 경우(호암 카페)도 있다.
나는 적확한 표현을 만들 수 있는 구조에 대해 빈번히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프로젝트에서 구조에 대해 굉장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관성적으로 구조 디자인에 매달리기보다 구조의 은현을 선택할 수 있는 건축가가 되고 싶다.

마무리
우리가 하는 작업은 누군가 닦아놓은 토대 위에서 만들어진다. 오랫동안 가꾸어진 대지에서 이루어진 프로젝트에 한정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건축은 특정한 건축주의 특정한 대지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완결된 작업일 뿐만 아니라, 건축 문화와 기술의 흐름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의미다. 우리의 생각이 다른 사람의 생각과 함께 확장되는 것, 완공 후에도 동결되지 않는 건축을 상상하는 것, 본질의 무게에 의탁하지 않는 것, 우리가 지금 꿈꾸는 것이다.
▲ SPACE, 스페이스, 공간
ⓒ VMSPAC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