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공간)」 2026년 3월호 (통권 700호)

옛 부르델 정원의 옹벽을 보존한 호암 카페(2025)의 전면부
사전 정보가 없었다면 목적지를 찾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완만한 경사면 풀밭에 하늘을 찌를 듯 꼿꼿한 자태로 줄지어 선 낙우송 숲 뒤로 나지막하게 누운 옹벽.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은 옹벽에 작게 뚫린 사각형 틈을 발견하고 그 안으로 스며들 듯 걸음을 옮기자 완벽하게 감춰진 동굴 같은 공간이 나를 환대했다.

상부 정원(옛 부르델 정원 자리)의 벽체. 벽체와 콘크리트 의자 사이 아래로 선큰 정원이 위치한다.
강한 경관
김진휴와 남호진(건축사사무소 김남 공동대표, 이하 김남건축)이 설계한 호암 카페(2025) 자리에는 호암미술관의 야외 갤러리 역할을 하던 부르델 정원이 있었다. 삼성그룹 고 이병철 회장이 1971년부터 직접 수집한 앙투안 부르델(1861~1929)의 역동적이고 구축적인 청동 조각들이 전시되었던 곳. 정원의 주인공인 ‘활 쏘는 헤라클레스’는 부르델의 대표작 중 하나로, 인체 근육의 팽팽한 긴장감을 극대화한 조각이다. 아르헨티나의 독립 영웅을 기리는 ‘알베아르 장군 기념비’는 ‘거대한 말’과 승리, 자유, 힘, 웅변을 상징하는 네 개의 우의상(allegorical sculpture)으로 구성된 대작이다. 부르델 정원의 질료와 형상뿐 아니라 공간감은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강한 경관을 빚어냈고, 인접한 호암미술관의 웅장한 양감과도 충돌했다. 1982년 개관한 호암미술관의 형태는 더 강하다. 외부에서 보면 1층은 불국사의 백운교를 연상시키는 세 개의 아치와 돌계단으로 구성된 위엄 있는 기단이다. 2층도 콘크리트 구조 한옥에 청기와 팔작지붕이 덮여 기단 못지않게 육중하다.

호암 카페 조성 직전의 대지 풍경(2024)
1997년 호암미술관 일대에 조성된 희원(熙園)의 경관 또한 강하다. 희원은 한국 전통정원의 미감을 재해석한 시도의 대표 사례로 평가되곤 한다. 이러한 평가의 논거로 주로 쓰여온 개념은 ‘차경(借景)’이다. 희원의 설계를 이끈 조경가 정영선(조경설계 서안 대표) 스스로도 “[주변] 풍경들을 최대한 정원에 끌어들이고자 담과 단, 대의 높이를 조정하며 다양한 시각으로 이를 바라볼 수 있게 구성했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그의 설계 의도가 특정한 지점에서 보이는 경관을 빌려오는 소극적 경험 방식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다. 정영선의 설명을 조금 더 이어서 들어보자. “… 호숫가를 따라 벚꽃나무 사이로 원로를 만들고, 먼 장래 수루 몇 칸 세울 수 있는 대를 물가에 쌓았다. 서쪽으로부터 경로를 여러 번 돌아 감기게 함으로써 마침내 도달할 미술관 앞마당까지, 그리고 후원 담 밖 뒷산까지 문과 계단, 담, 대, 단 등을 반복해 엮었다. 즉 호수와 산, 미술관 사이가 비록 짧은 단락의 공간이지만, 가능한 한 깊은 주름들을 지형으로 만들어 점진적으로 경관들을 보며 나가게 함으로써, 유연한 공간의 체험 끝에 … 자신이 어디쯤 소요하는지 쉽사리 찾을 수 없게 구성했다.”▼1 이러한 맥락에서 조경사학자 임한솔은 희원에서는 조망 대상과의 관계 설정과 점진적 시각 전개를 통해 자연‐건축‐정원의 경계 넘나듦이 구현되었다고 해석한다.▼2 이처럼 희원은 정태적인 공간을 넘어 역동적인 장소를 의도하고 머무르기보다는 움직이는 경험을 극대화한, 강한 경관이다. 그뿐 아니라 희원 내부의 경관에는 정자, 연못, 석단, 화계, 담장 등 다양한 경물이 얽혀 있고, 신라의 석탑을 비롯해 무명의 석공들이 다듬은 불상, 벅수, 석등, 물확 등이 풍성하게 배치되어 있다. 복합적 ‘경관 행위자-연결망’이라 할 만큼 강한 희원과 호암미술관의 경관 속에 또 다른 조형적 발언을 적층한 부르델 정원 부지가 호암 카페의 건축가에게 던져진 것이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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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영선, ‘희원’, 「환경과조경」 201(2005. 1.), 134쪽.
2 임한솔, ‘살아있는 과거, 전통의 재현’, 『한국 조경 50년을 읽는 열다섯 가지 시선』, 한국조경50 편집위원회 편, 한숲, 2022, 77~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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