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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원화의 전시의 공간] 1. 전시장의 입구

글
윤원화
진행
박세미 기자

성수동의 신도리코 본사 건물에는 신도문화공간이라는 전시 공간이 있다. 일반적인 사내 갤러리처럼 1층 로비에 별도의 공간을 조성한 것이 아니라 사무 공간의 복도를 전시장으로 확장한 거라서 들어가기가 조금 까다롭다. 사원이 아니라면 후문의 관리실에서 출입증을 받아 엘리베이터로 접근할 수 있는데, ‘여기에 뭐 볼 것이 있습니까?’라는 약간의 귀찮음, 궁금함, 또는 으쓱거림이 뒤섞인 공기를 통과해야 한다. 처음 이곳을 찾는 사람은 왜 이런 곳에 갤러리가 있는지 의아해한다. 그러나 갤러리는 원래 회랑을 뜻했으며, 가장 오래된 미술관 중 하나인 피렌체의 우피치 갤러리는 원래 메디치가의 사무 공간에 부속된 전시 공간이었다. 그것은 주인을 만나러 온 손님에게 가벼운 시각적 향연을 제공하고 주인에게 반투명한 광채를 더한다. 그러나 손님이 빛나는 것들에 둘러싸여 천천히 걷다가 문득 시선이 가는 곳에서 멈출 때, 그는 본래의 경로를 이탈하고 가상적으로 어딘가 다른 곳을 향한다. 그곳이 새로운 목적지로 설정되면 전시는 건축적 공간에 부가된 장식적 요소에 그치지 않고 독자적인 프로그램으로 분리된다. 

 

실증적으로 말해서 전시는 무언가를 보이게 하는 시각적 장치다. 그것은 무엇을, 왜 보여야 하며 그렇다면 어떻게 보이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일련의 판단에 따라 구성되고 다양한 목적으로 활용된다. 비직관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전시 공간에 놓이는 구체적인 전시물들은 전시의 일차적인 대상이 아니다. 이를테면 역사박물관이 보여야 하는 것은 과거이며, 개별 전시물들은 직접 접근이 불가능한 과거를 소환하는 매개체로 작동하고 그 후광을 입을 때 비로소 유물로 나타난다. 전시는 목적이 명확할수록 전시 그 자체가 아닌 어딘가 다른 곳으로의 입구가 된다. 산업박람회는 기업들과 그들이 구성하는 산업, 즉 인간과 자연에서 쓸모를 추출하는 일련의 생산적 공정들로 연결된 관문이다. 방문자들은 미로처럼 얽힌 회랑들의 공간에서 그들이 만나야 할 누군가에게 도달하기를, 간단히 말해 미래와의 접점을 찾길 바란다. 

오늘날 모든 전시는 얼마간 산업박람회인 동시에 역사박물관이 되어가는 경향이 있고, 미술, 디자인, 건축 같은 문화예술 분야의 전시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이런 전시들은 과거에서 미래에 이르기까지 가능 세계를 제한하는 현실 원칙을 잠시 유보하고 그들만의 영토를 드러내 보이고 싶어한다. 일반적으로 디자인 전시라면 서비스 공급자와 소비자의 관계 속에서, 건축 전시라면 외부 환경과 그에 거처를 구축하고 거주하는 자의 관계 속에서, 다시 말해 각자가 맡은 직책의 관점에서 유의미한 변수들로 재구성된 어떤 논리적이고 환상적인 세계의 모형을 상연한다. 그러나 미술은 그런 직책이 없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전시 공간이 그들의 영토라고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또는 작가와 관객이 모두 전시라는 장치의 일부로서 자의식을 가지게 된다고 하자. 미술은 다만 눈에 보이는 것이 어떻게 거기 없는 것으로의 입구가 되는지 탐구하고 그것을 통해 또는 그 자체를 보이려 하는데, 그 결과는 가상의 구축물이나 그 해부도가 될 수 있지만 어느 쪽도 깨끗하게 딱 떨어지지는 않는다. 

전시 공간에 접근하는 한 가지 방법은 그것을 당신이 사회적 직책을 벗어나거나 그 관습을 원점에서 재검토할 때 마주하는 공백의 한 형태로 생각하는 것이다. 책을 쓰기 위한 깨끗한 새 공책, 또는 퇴사 후에 갑자기 텅 비어버린 스케줄러를 상상해보라. 기본적으로 갤러리는 그저 빈 공간이며 전시가 완성된 후에도 많은 부분이 비어있다. 그것은 영화나 비디오 게임, 이국으로의 긴 휴가, 또는 끝없는 혁명처럼 몰입적인 탈출로를 제공하지 않는다. 디자인 전시는 종종 전시 공간을 빈틈없는 커뮤니케이션 미디어로 재구성하려는 열망을 표출하지만, 그조차도 그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전시의 목적에 구속되지 않고 멋대로 움직일 여지를 완전히 봉쇄하지는 못한다. 전시는 그것을 보는 사람이 직접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가동되지 않는 이상한 마술이다. 당신은 무대 뒤의 장치들을 볼 수 있고 마술사가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전부 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더 없는 것 앞에서 당신은 문득 놀란다. 

제도화된 미술 공간은 이런 현상을 다소간 물신화한다. 전시물을 예외적인 미술 작품으로 판매해야 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미술 전시가 사물 자체보다도 그것이 드러내는 수수께끼 같은 결여 또는 공백으로 사람을 끌어들인다면, 이 공백은 전시의 효과로서 출현하기 전에 전시 공간에 감각적으로 미리 짜여있는 경우가 많다. 이제는 고전이 된 화이트 큐브 형태의 전시장은 그 자체로 밀도 높은 공백을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삼청동의 바라캇 컨템포러리는 이런 공백이 상당히 극적으로 연출된 곳이다. 내외부의 기압차가 있는 것처럼 무겁게 밀리는 철문을 지나면 하나의 육면체 공간이 눈앞에 나타난다. 입구에 서면 공간 전체가 한눈에 파악되지만 모든 부분이 보이지는 않아서, 관객은 자연스럽게 내부를 돌며 벽 뒤와 계단 너머에 숨겨진 부분들을 확인하고 전체를 다시 조망하는 일련의 시점들을 지난다. 그렇게 움직이는 시선 속에서 전시는 육면체 모양의 자기완결적 목적지로 종합된다. 

그렇지만 전시가 늘 그렇게 투명하고 충만한 목적지로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전시의 고유한 공백은 어쩌면 좀 더 많은 경우에 불투명하고 공허한 공간 또는 데드 스페이스와 연관된다. 달리 쓰임새가 없는 공간이 전시를 위한 공간으로 전환되는 것은 후기 산업 도시의 오래된 관습이다. 미확정의 공백이 죽음과 재생 사이에서 머뭇거린다. 이런 진동은 지저분한 콘크리트와 반쯤 뜯어낸 마감재가 그대로 노출된 구도심의 전시장들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본래의 터전을 벗어나 공백 속으로 재배치되는 전시물은 모두 어느 정도 이런 위험을 감수한다. 또는 공백 속으로 뛰어내린다고 하자. 그것은 알 수 없는 변신을 위한 입구이며 자신이 확정적이라고 주장하는 외부 세계를 출렁이며 비추는 수면이다. 그런 공간을 걷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멀미가 나지만, 그것이 이른바 현실보다 덜 가상적이라고 느껴질 때가 있다. 우리가 항상 어떤 목적지를 향한 여정 속에서 또는 심지어 그 목적지에 도착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닌 탓이다. 문득 발이 멈추는 것은 길을 잘못 든 것이 아닐까 또는 애초에 위치를 착각한 것이 아닐까 생각할 때다. 이런 곳에 무슨 볼 것이 있을까, 라고 생각하는 순간 당신은 전시장의 입구에 있다. 

 

 

신도문화공간. 정희승 개인전 <카피어>(2020) / Image courtesy of Shindoh Art Sp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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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원화
윤원화는 시각문화 연구자다. 저서로 『그림 창문 거울: 미술 전시장의 사진들』, 『1002번째 밤: 2010년대 서울의 미술들』 등이 있다. <다음 문장을 읽으시오>(일민미술관, 2014)를 공동 기획했고,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2018에서 ‘부드러운 지점들’을 공동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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