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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건축과 풍경사이

글
이상대
사진
김재윤(별도표기 외)
자료제공
스페이스연건축사사무소
background

01

‘어떻게 시작할까?’, ‘무엇이 중요한가?’라는 질문으로 늘 건축을 시작한다. 이에 대한 답은 하나로 귀결되지 않고 프로젝트마다 다른 해답과 상황을 만들어준다. 대지 상황, 프로그램의 특수성, 건축주의 요구 사항 등 무수한 변수는 건축을 다양하게 확장하는 중요한 요소이지만 이런 요인들에 영향받지 않는 스스로의 고유한 언어는 무엇인지 한편으로 생각하게 된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 그것이 각자가 건축을 해나가는 근간일 수 있다. 이는 마치 망망대해를 외로이 미끄러져 가는 항해에서 의지하게 되는 별자리와도 같은 것이다. 

1990년대 초 프랑스 유학 이후 나는 줄곧 빛, 시선, 내외부의 관계, 근원적 건축 형태와 공간 등에 깊은 관심을 가져왔다. 어렸을 적, 봄기운을 싣고 들어온 햇살이 마룻바닥에 일렁이는 아지랑이를 피워냈을 때의 따스한 여운이 아직 손에 잡힐 듯 기억에 생생하다. 내가 하는 건축이 그런 기억을 담아내는 좋은 그릇이길  바란다. 많은 기억과 풍요로운 빛을 담을 수 있는 그릇. 거기에 바람이 스치는 촉감을 담아낼 수 있으면 더 좋겠다. 거칠게 벽면을 쓸고 내려오는 장엄한 빛을 나에게 경험시켜준 롱샹성당처럼.

 

02

일요일 오후 낮게 드리워진 햇살이 흔들리는 나뭇잎과 만나 만들어내는 풍경도 아름답지만, 천창을 따라 들어온 빛줄기가 흰 벽면에 부딪혀 내부의 표정을 바꾸어나가는 모습도 좋다. 멀리 야트막한 산의 흐름을 따라 가로수와 마을이 겹쳐진 풍경도 좋지만, 무채색 석조 바닥과 처마의 수평선 사이로 살포시 얹혀진 산세의 흐름도 좋다. 마을 밖 정자나무 아래서 소소한 삶의 이야기가 오가는 오후

나절의 한가로움도 좋지만, 아무도 없는 중정에서 구름이 흘러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좋다. 완만한 지형의 흐름을 따라서 뾰족탑과 경사지붕들이 만들어내는 실루엣도 아름답지만, 자연의 흐름에 인간의 의지를 드러내는 수평적 실루엣이 던지는 도전도 아름답다. 

자연과 주고받는 사소한 건축의 이야기는 건축을 자연에 묻으려는 것이 아니라, 건축을 통해 자연을 드러내고자 하는 행위일 것이다. 물론 이는 자연과 건축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교감이 아닌, 모든 건축물이 주변과 관계 맺기를 하는 방식이다.

 

03

건축은 상황에 맞추어 변주될 수 있다. 나의 건축도 주변에 따라서 공간구조와 표정이 바뀌어간다. 주변을 인식하는 방식이 공간구조에 영향을 미친다. 도시한옥이 한 뼘도 안 되는 마당에 기대어 세상과 소통하고, 오래된 시골의 전통한옥이 안채와 사랑채, 안마당과 바깥마당을 두어 세상과 소통하듯이 말이다. 고밀화되고, 주변이 늘 변하는 도시환경 속에서 나의 건축은 바깥으로 관심을 드러내면서도, 그 안의 내면으로 더 빠져든다. 

우주가 무한한 공허 속에서 항성이 발산하는 빛으로 존재를 인식하듯, 건축적 소우주에도 비워짐과 그 사이를 파고드는 빛이 필요하다. 다양한 방식의 비움과 다양한 질감의 빛으로 만들어진 소우주이고 싶다. 반면 주변 건물이 드문 광활한 평야에서는 건축 스스로가 우주이기보다는 더 큰 세계의 일부로 주변과 관계하고 싶다.

주변을 인식하는 방식에 따라 질감도 바꾸어간다. 투박한 질그릇의 원초적 느낌이 좋다. 그렇다고 매번 질그릇만 식탁에 놓고 싶지는 않다. 질그릇이 놓여서 어울리는 음식과 식탁이 있듯, 놋그릇이 어울리는 음식도 있고, 맑은 크리스탈이 더 어울리는 식탁도 있다. 건축도 마찬가지이다. 벽돌의 원초적 질감을 좋아한다. 하지만 징크의 금속성 질감도 좋다. 색깔이 바래어져 가는 목재도 좋다. 장소와 공간에 적합한 질감을 찾아줄 수만 있다면, 어떠한 재료도 관심의 대상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장소에서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액트파트너 사옥

 

04

건축은 싫든 좋든 흔적을 남기게 된다. 그 흔적을 때로는 드러내고 싶고, 때로는 드러내고 싶지 않다. 다만 드러내고 싶은 흔적이 더 많아지기를 바란다. 어떤 흔적을 드러내고 싶은가? 건축물은 완성된 순간부터 낡아가는 숙명을 타고났다. 낡아가는 시간 속에서도 건축을 통해 전하려는 감성이 흔적으로 남아있길 바란다. 그동안 도시에서 진행된 프로젝트에서 찾고자 했던 감성을 더듬어본다.

서교동 우켄주 카페 리모델링에서는 홍대 앞 주차장거리의 어수선한 외부환경을 내부로 끌어들이기 싫었다. 기존 다가구주택의 3층 슬라브를 걷어내고, 옥상 슬라브를 걷어냈다. 드디어 하늘이 열렸다. 천창을 지나 미끈한 흰 벽면과 시멘트벽돌을 훑고 내려오는 빛을 배경으로 커피향이 올라가는 모습을 좋아했다. 더군다나 예전 다가구주택의 욕실 타일 흔적은 마치 로마의 목욕탕 유적처럼 벽면에 과거와 현재의 시간성을 드러내고 있다.

논현동 d’A 사옥에서는 내부에서 조망되는 하늘을 넘어서 바람의 촉감을 느낄 수 있는 마당을 각 층에 두고 싶었다. 옆집의 멋진 단풍나무가 마당으로 가지를 슬쩍 걸쳐주기를 바랐고, 흰 벽면과 슬쩍 걸쳐진 옆집의 나무, 그 위로 펼쳐지는 하늘에서 단독주택의 기억을 더듬어보고 싶었다. 마당에서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상상했다. 또한 내부로 깊게 파고드는 빛이 2개

층으로 개방된 공간의 표정을 바꾸어주길 원했다.

최근에 완성된 성수동 프로젝트에서는 외부마당이 수직으로 변형되었다. 흰​ 벽면은 다공질의 시멘트벽돌로 바뀌고, 파편화되어 들어오는 빛들이 벽면을 가득 채움으로써, 사이 공간이 중심 공간으로 전환된다. 옥상마당 이외에는 외부 공간을 갖지 못하는 대신, 텅 빈 사이 공간이 빛과 함께 마음을 채울 수 있다.

도시 프로젝트들의 공간 구성 방식은 다양한 방법의 내향적 공간구조에 기대고 있다. 이는 도시의 복잡성에 대응하여, 내부로 침잠하고 감성을 극대화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05

그렇지만 주변에 대응할 건축물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완만한 구릉지와 평야가 펼쳐진 농촌지역에서 건축은 스스로 주변에 말을 건다.

김제의 계획부지는 잘 가꾸어진 평야지대에서 마지막으로 남아 있길 바라는 원시림 같은 존재였다. 개간될 대상지를 상상할 때 떠오르는 첫 느낌은 리차드 롱의 대지예술이나, 제주도의 돌담이 주변과 대응하는 방식이었다. 대지에 순응하기보다는 서로의 존재를 더 부각할 수 있는 모습. 내 건축은 김제에서 조금은 도도하게, 조금은 조심스럽게 주변과 대화하려 했다. 마치 시골로 전학 온 도시 아이의 모습이다. 바깥으로 나를 닫은 듯 도도해 보이지만, 외피는 시스루의 형식을 취한다. 마치 서로 훔쳐보기라도 하는 듯하다. 개비온은 대지의 질감을 갖고 있으면서 투과성에 의해 외부와 내부를 선택적으로 이어주는 여지를 남긴다. 쌓인 돌들의 틈새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은 하루의 시작을 알리듯 실내 바닥에서 아름다운 군무를 추며 흘러간다.

같은 건축주로부터 나주에 유사한 프로그램의 건축을 의뢰받았다. 나주 땅에 대한 첫인상을 최대한 머릿속에 간직한 채 설계를 해나갔다. 김제에서 도도하게 존재를 드러내고, 외부에서 바라봐주길 바랐다면, 나주에서는 내부에서 외부를 바라보는 방식으로 주변과 관계 맺으려 했다. 주변의 배밭 풍경과 함께, 저 멀리 있을 영산강을 조망할 수 있는 데크를 설계에 담는다. 그리고 이 건물을 찾아올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며 이야기를 던질 수 있는 건물의 얼굴이 되어줄 데크를 설계에 담는다. 또한 일이 끝난 후 일몰을 바라볼 수 있는 데크를 설계에 담는다. 직육면체의 형태는 목재로 마감되어지고, 세 개의 데크가 내부 공간과 결합된 형태로 변형되어져 주변과 대화하고자 손짓을 한다.

 

경농 김제미래농업센터 (image courtesy of Park Jinmyong)

 

경농 나주미래농업센터​ 

 

06

김제와 나주에 이어 이천에 종자연구센터를 다시 맡게 되었다. 이천의 대상지는 김제 나주와는 또 다른 느낌의 농촌 풍경을 갖고 있었다. 완만한 구릉지의 정점에 위치한 대지는 사방으로 시야가 열려 있으면서도 자동차의 통행이 거의 없는 완벽한 농촌의 모습이다. 가까이 있는 아름드리 느티나무에서부터 저 멀리 있는 마을의 뾰족탑까지 모두 놓칠 수 없는 경관이었다.

앞서 주변의 풍경과 어우러지고, 주변과 수줍게 대화하려 했다면 이곳에선 건축이 스스로 주변 경관과 일체화되기를 의도했다. 스스로가 경관이 되어 존재가 사라지는 상황을 상상해본다. 착시효과(trompe l’oeil)는 흥미로운 건축적 소재이다. 마술쇼에서 관객들은 어느 순간 눈앞의 실체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놀라움과 즐거움을 동시에 느낀다. 물론 이것이 실제가 아님을 알지만 그래도 흥분한다.

건축은 어느 순간 진지함을 벗어던지고, 주변과 다른 방식으로 소통하고자 한다. 존재를 도도하게 드러내던 방식에서 이제는 주변과 하나이고자 한다. 주변과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존재가 사라지는 방식으로, 완벽하게 자연과 하나가 되는 꿈을 꾼다. 장 누벨이 세느강 변에 완성한 케 브랑리 박물관에서 건축이 사라지는 멋진 마술쇼를 경험한 기억이 있다. 하지만 투명함과 겹침의 방식은 거대한 볼륨을 감추면서 주변의 풍경이 경관이 되는 재미있는 방식이지만 너무 도시적이다.

주변의 경관 속으로 사라지는 방식으로, 주변 경관을 건물의 입면에 반사하는 방식을 생각했다. 실재의 풍경과 입면화된 풍경의 겹침, 그 사이에 존재하는 투명한 건축 요소의 중첩은 주변 경관과 건축이 결합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실체로서의 건축과 실체로서의 풍경 그리고 그 풍경을 담는 건축적 틀과 반사된 풍경들.

 

07

농촌과 도시에서 최근 몇 년의 시간 동안 진행된 나의 건축 여정은 오랫동안 스스로 구현해보고 싶었던 건축에 대한 여러 생각을 현실화하는 과정이었다. 이는 누구나 관심을 두는 보편적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단지 이성적 사고 속에서 감성을 드러내려는 스스로의 내면적 과정이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 과정이 다음 이야기의 단초를 제공해줄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다.​ <진행 박성진 편집장>

 

 

 

 

동오시드 이천종자연구센터

 

각 프로젝트의 도면, 비평 등 자세한 내용은 SPACE 2018년 3월호 지면에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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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대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와 프랑스 파리 벨빌건축대학에서 건축설계 및 이론을 공부하고, 학위(D.P.L.G)를 받았다. 한울건축과 건원건축에서 실무를 했다. 현재 (주)스페이스연건축사사무소 대표로 활동 중이며, 연세대학교에서 건축설계를 가르치고 있다. 건축이 빛과 조우하는 다양한 방식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내부와 외부의 경계점에 대한 다양한 공간을 만들어가고 있다. 홍대 앞 우켄주 프로젝트로 한국리모델링건축대전 우수상(2013), 경농 김제미래농업센터로 한국농촌건축대전 본상(2016), 논현동 d’A 사옥으로 서울시건축상 최우수상(2017)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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