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은 지식의 확장보다 상상력의 확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1
서울에 사는 성인이라면 서울의 모든 지역을 갈 수 있지만 실제로 모든 곳을 가는 건 아니다. 우리는 가던 곳만 간다. 가끔 추천받은 식당이나 숍을 위해 새로운 동네를 가지만 큰 결심이 필요하다. 강북 사람들은 강남 갈 때마다 자기장을 통과하는 기분이라며 투덜대고 강남 사람들은 강북에도 그런 (좋은) 곳이 있어?라고 반문한다. 지도 앱이 핸드폰에 저장되고 SNS와 연동된 현실의 구석구석이 개발되고 을지로, 성수, 연희의 숨은 가게들까지 찾아낼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도와 현실 사이의 공백은 여전히 존재한다. 물론 그곳들이 실제로 텅 비어(空白)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바로 옆에 있음에도 평생 존재하지 않는 곳이 있다.
2010년대 초반, 나는 서울역 맞은편 서울스퀘어에서 야간경비원으로 일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틈날 때마다 주변을 걸었다. 몇 년 후 서울로 7017이 개장했고 소월로에 피크닉(piknic)같이 힙한 장소도 생겼다. 나는 경비원을 그만둔 후에도 종종 이 일대를 걸었다. 백범 광장을 지나 남산도서관까지 갔고 서울로를 건너 피크닉에 갔으며 서울스퀘어를 보며 야간경비원으로 일한 시절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한 번도 동자동에는 가지 않았다. 서울역과 남산 사이, 서울스퀘어와 맞닿은 곳에 있는 지역인데도 말이다. 동자동이라는 이름도 몰랐으며 그곳에 쪽방촌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붉은 깃발
친구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이불 작가의 전시 <시작>을 보고 정동길을 걸었다. 저녁까지 시간이 남았고 친구는 동자동에 가자고 했다. 기사에서 동자동 쪽방촌 재개발에 대해 봤는데 궁금하다는 거였다. 확인해보니 익숙한 동네였다. 여기에 쪽방촌이 있었어?
쪽방은 최저주거기준 미만의 주택으로 갈 곳 없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찾는 곳이다. 지옥고(지하, 옥탑, 고시원) 아래 쪽방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지만 빈곤층이 노숙자가 되지 않도록 최후의 안전망 역할을 하며 때로는 사회적 발판 역할도 한다.
동자동은 조금 낙후됐지만 여느 동네와 큰 차이가 없었다. 다만 집집마다 붉은 깃발이 걸려 있는 게 특이했다. 벽에는 피해자들을 위한 깃발이니 훼손하지 말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우리는 깃발이 부당한 재개발에 맞선 시위의 의미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2021년에 붉은 기가 골목을 수놓을 정도면 대단한 시위 아니겠어?
그러나 아니었다. 아니, 아니라고 말해야 할지 맞다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동자동의 상황을 간단히 정리하자. 동자동은 2021년 2월 정부에 의해 공공주택사업 지구로 선정되었다. 토지 소유주와 건물주들은 정부의 결정에 반대한다. 그들이 원하는 건 민간 개발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 편이 훨씬 수익이 크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장한다. 토지와 건물은 사유재산이다!
그러니까 붉은 깃발은 토지 소유주와 건물주들이 내건 것이다. 뭔가 거꾸로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 붉은 기는 공산주의자들의 몫 아니었나? – 아무튼 사태는 그렇다. 중요한 건 동자동의 실제 거주민인 쪽방촌 사람들이 소외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부분 세입자인 이들은 민간이 개발한 경우 집을 잃고 쫓겨날 가능성이 크다. 반면 소유주 중 동자동에 사는 사람은 10% 남짓이다. 소유주들은 목돈이 없는 쪽방촌 사람들의 처지를 노려 높은 월세를 받기도 한다. 통계에 따르면 쪽방의 평균 평당 임대료는 18만 2550원으로 서울 아파트 평균 평당 월세인 3만 9400원을 훨씬 상회한다. 쪽방 주거자들은 많은 경우 국가에서 주거 지원금을 받는데 소유주들은 그 돈을 노리는 셈이다. 이를 빈곤 비즈니스라 부른다.
동자동 쪽방촌으로 검색을 하면 상반된 게시물이 나온다. 한쪽에서 쪽방촌 주민들의 생존과 주거를 보장하라고 요구하고 다른 쪽에선 부동산 대박찬스, 투자기회, 사유재산 침해를 외친다. 어떤 블로거의 해시태그는 다음과 같다. #동자동쪽방촌 #경매로100억부자되기
관광객의 철학
일본의 철학자 아즈마 히로키는 2017년 『관광객의 철학』을 출간했다. 관광객에게 무슨 철학 씩이나… 여행자, 순례객도 아니고…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즈마가 노린 건 바로 그 지점이다. 관광객의 철학을 간단하게 설명하면, 가벼운 접근이 우연을 만나고 이러한 우연이 우리에게 연대의 가능성을 연다는 거다. 말하고 보니 너무 간단해지는데 사실 철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복잡하고 예민한 문제다. 아즈마 히로키는 『관광객의 철학』을 출간하기 전 『후쿠시마 제1원전 관광지화 계획』을 출간했고 극심한 비난을 받았다. 책은 제목 그대로 후쿠시마를 관광지로 만들자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비난의 세세한 내용을 짚어보지 않아도 어떤 반응이었을지 짐작이 간다. 누군가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기 위해 진도항 관광지화를 주장했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나 아즈마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이미 이러한 관광화를 실천하고 있다. 아우슈비츠, 히로시마, 체르노빌, 광주 등등 역사적 비극과 재난의 현장에는 공원과 박물관, 투어 프로그램 등이 존재하고 해마다 수천에서 수십만의 사람들이 방문한다. 단지 이곳을 가리키는 단어가 추모, 기억, 순례 등 관광과는 전혀 다른 뉘앙스일 뿐이다. 그러니까 어쩌면 여기에는 언어의 문제가 존재하고 언어는 우리의 사고를 제한한다. 경박한 관광과 진지한 추모의 간극. 아즈마 히로키가 도발하는 건 이러한 태도와 규정이다. 기존의 시선으로는 사건과 진짜로 만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추모는 비극을 물신화한다. 추모객은 자신이 보고자 한 것만 본다. 반면 훨씬 가벼운 태도의 관광객은 사람들을 사건과 예상치 못한 경로로 조우하게 만든다. 일종의 산책자처럼 말이다.
물론 이는 어느 정도 개념적이고 철학적인 이야기다.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어느 쪽이 더 의미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동자동에 갔을 때 나는 아즈마 히로키의 관광객의 철학을 떠올렸다. 가벼운 마음으로 갔는데 전혀 예상 외의 장소를 만나고 몰랐던 사실들을 알게 된 것이다. 그가 말하고자 했던 우연과 연대는 이런 것 아닐까. 지도에서 숨겨진 곳들을 발견하는 것, 감춰진 현실과 조우하는 것. 아즈마는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에 방문했을 때 그곳에 사람들이 여전히 ’평범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한다. 미디어에서 접하는 것과 다른 실제 냄새와 부피, 신체를 가진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는 모습, 그것이 그로 하여금 비극이 먼 거리에 있는 게 아닌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며 그들이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줬다고 말이다. 리처드 로티는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에서 “우리라는 감각을 가능한 한 확장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쓴다. “이것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이어가야 할 과정이다. 우리는 주변화된 사람들, 즉 우리가 여전히 본능적으로 우리라기보다는 그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찾으려고 애써야 한다. 우리는 그들과 우리의 유사성에 주목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1 아즈마 히로키, 『관광객의 철학』, 안천 옮김, 리시올, 2020, 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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