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캐드를 시작으로 파라메트릭 디자인과 알고리즘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건축에서 급진적인 발전과 성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알베르티 이후 ‘설계’와 ‘시공’ 영역을 구분하는 매체였던 ‘도면’이 건축 시뮬레이션으로 차츰 대체되면서 건축가 업역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이런 상황을 데이비드 로스 쉬어는 『The Death of Drawing: Architecture in the Age of Simulation』(2014)에서 ‘도면의 죽음’이라 진단했다. 그로부터 7년이 흐른 지난해 10월, 이 책이 국내에 번역, 출간됐다. 이 책을 번역한 이준석(명지대학교 교수)을 만나 건축가에게 도면이란 어떤 의미인지, 기술 발달이 건축 실무와 건축 교육 현장에 미칠 영향과 메시지는 무엇인지 이야기를 나눴다.
인터뷰 이준석 명지대학교 교수 × 방유경 기자
방유경(방): 『건축 시뮬레이션 시대와 도면의 죽음』은 건축가의 표현 도구라 할 수 있는 도면과 매체의 변화를 깊이 있게 다룬 책이다. 국내에서 쉽게 출간되지 않았던 이런 주제의 책을 번역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이준석(이): (사)한국건축학교육인증원 업무로 2018년에 영국 런던을 방문했을 때, 영국왕립건축가협회에서 운영하는 서점에 들렀다가 우연히 이 책을 발견했다. 학생들에게 이 주제를 어떻게 가르칠까 고민하던 시점이라 책을 보자마자 너무 반가웠다. 한국으로 돌아와 인연이 있던 출판사에 연락해 먼저 출간을 제안했다. 1년이면 번역을 마칠 거라 생각했는데, 2019년 초에 시작해서 2년 정도 걸렸다.
방: 구체적으로 어떤 지점에서 출간의 필요성을 느꼈나?
이: 대학에서 설계를 가르친 지 20년이 넘었다. 매년 수업에서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설계의 테크닉은 발전하는데 상대적으로 건축적 교양과 이론이 취약하다고 느꼈다. 특히 작품을 이해하고 파악하는 역량이 부족했다. 국내 건축 교육의 기반이 공학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미국이나 유럽에 비해 인문학적 접근이나 건축 역사에 대한 교육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건축사 수업에서 이론과 역사적 사례들을 깊이 있게 접하고, 설계수업을 통해 표현에 대한 시각훈련을 쌓아야 한다. 하지만 충분한 과정을 거치지 못하다 보니, 건축을 읽고 표현하는 눈과 손의 협응 능력을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다. 수박 겉핥기 식으로 학습한 표현은 결국 자기 것이 되지 못한다. 르네상스 시대부터 현대까지 건축가의 ‘표현’을 다룬 이 책의 주제와 논쟁적인 질문이 우리 건축계와 건축학교에 필요한 담론이라고 생각했다.
방: 이 책은 전통적으로 건축가의 영역이라 여겨졌던 도면을 대체하는 기술, 즉 시뮬레이션이 도입되면서 건축가 업역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음을 지적한다. 실무를 거쳐 교육 현장에 몸담은 한 사람으로서, 이런 문제의식에 대해 어떻게 느끼고 있나?
이: 저자인 데이비드 로스 쉬어는 현재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건축가이자 교육자다. 미국에서 빌딩 정보 모델링(Building Information Modeling, 이하 BIM)이 막 움트던 1990년대 말에 이 개념을 자신의 실무에 도입했던 선도적인 전문가이기도 하다. 이런 배경을 가진 인물이 기술의 급진적 발달과 그에 따른 건축가라는 업역의 도전과 위협을 생생히 증언하는 것이 너무나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디자인 업무의 매력, 설계와 시공 과정에서 쥘 수 있는 주도권과 위상. 다수의 건축학도들이 이런 것을 동경하면서 건축가를 꿈꾸지 않나? 하지만 건축가를 바라보는 일반 대중의 인식이 바뀌고 있는데, 정작 우리 건축가들은 이런 변화에 둔감한 상황이다. 건축가를 양성하는 대학에서조차 이런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2014년에 출간된 이 책이 우리에게 유효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방: 책의 1~2장은 표현과 시뮬레이션, 도면과 건축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고찰한다. 구체적으로 건축에서 도면이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이: 건축에서 ‘도면’이란 건축가의 의지가 표현된 도구이자 결과물이다. 여기에는 문제를 창의적으로 탐구하는 ‘건축 창의적 사고(design thinking)’ 능력이 중요하게 작동한다. 문제해결 과정을 형태로써 제시하려면 고도의 시각적 훈련과 소질이 뒤따라야 한다. 따라서 르네상스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건축가는 ‘장인정신(craftmanship)’을 가지고 도면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 건축가는 ‘도면’을 주도하고 정보를 쥐고 있는 결정권자이기 때문에 클라이언트, 시공자 등 건축을 둘러싼 이해관계자들 사이에서 확고한 업역과 위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방: 저자는 시뮬레이션이 도면의 역할을 대체하고 있는 상황을 다양한 사례를 통해 소개하고 있다. 시뮬레이션이란 무엇이고 건축에서 어떻게 활용되고 있나?
이: 건축 시뮬레이션은 현실의 경험을 대체하는 디지털 모델로서, 건축계획 결과를 가상 세계에서 성능과 경험으로 전달한다. 건축에서 보편적으로 접하는 두 가지 시뮬레이션 도구는 BIM과 전산화 설계기법(computational design)이다. 디지털 기술은 단순 도면을 생성하는 초기 오토캐드 프로그램을 시작으로 실무에 도입되었다. 나 역시 미국 유학 시절 내내 학교에서는 손으로 도면을 그리다가, 실무를 1995년 시작한 이후로는 컴퓨터로만 도면을 작도했다. 이후 BIM이 발전한 배경은 ‘성능’과 관련이 있다. 2000년대 초 미국 연방조달청이 건물 운용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모든 대규모 공공 프로젝트에서 BIM을 기반으로 한다는 선언을 했기 때문이다. BIM이 몰고온 새로운 변화는 설계 프로세스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건축가 업역에 실질적인 위기감을 준 것은 컴퓨터 스스로 연산을 통해 형태를 생성하는 전산화 설계기법이다. 일정 정보값을 투입하면 디자인이 산출되는 방식으로, 이를 활용한 설계 이론을 설파한 건축가가 그렉 린이다.
방: 스케치부터 다이어그램, 완성 도면에 이르기까지 건축적 행위를 통해 생산된 모든 표현을 도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무언가 그리는 행위는 사용하는 매체의 특성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본다. 펜과 종이에서 컴퓨터로, 매체의 변화에 따라 사고하는 방식에도 변화가 생길 것 같다.
이: 미국 건축대학에서 교과서로 널리 쓰이는 프랜시스 칭의 공저 『Design Drawing(디자인 도면)』(1998)은 창의력이라는 사고의 인지행위가 형태적인 걸 떠올리면서 발생한다고 말한다. 동일한 내용이 이 책에도 언급된다. 연필을 손에 쥐고 백지에 무언가를 그리는 순간, 새로운 해석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이디어를 도면으로 옮길 때 원래 생각과 다르게 표현되면서 또 다른 창의적인 사고의 싹을 틔우게 된다. 나 역시 컴퓨터가 디자인 첫 단계부터 활용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표현’을 기반으로 하는 전통적인 방식이 사라질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모니터 화면을 통해 사고하고 창작하는 행위와 실제 손의 느낌으로 아이디어를 발전시켜가는 행위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5년제 건축학과 커리큘럼에서 저학년 과정에 반드시 손으로 하는 설계 실습을 한번은 거치도록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방: 현재 대학에서 ‘건축시각표현’이라는 강의를 맡고 있다. 실제 교육 현장에서 이런 생각은 어떻게 적용되고 있나?
이: 건축시각표현은 3~4학년 학부생을 대상으로 개설된 과목이다. 이 수업을 기획하면서 크게 두 가지 목표를 설정했다. 첫째는 건축가가 생산해낸 역사에 남을 만한 도면적 성과를 많이 보여주는 것이고, 둘째는 게슈탈트 이론과 같이 시각표현을 인지하는 프로세스를 이해시키는 것이다. 건축가의 작업 성과는 도면을 통해 전달된다. 고딕건축에서 지금의 현대건축까지 이런 원리가 나타난 훌륭한 도면들을 많이 보여줄수록 학생들의 수준이 높아지는 것을 느꼈다. 따라서 바우하우스의 시각 훈련처럼 이런 성과물들이 표현되고 인지되는 시각적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것이 수업의 중요한 부분이다. 최종 과제는 학생들이 자신의 설계 과제와 관련된 표현물을 직접 만드는 것이다. 설계수업과 긴밀하게 연계되다 보니 학생들의 이해도와 만족도도 높다.
방: ‘도면의 죽음’은 언뜻 비관적인 전망을 내포한 제목처럼 다가온다. 궁극적으로 이 책이 가리키고 있는 건축, 건축가의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
이: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자는 “건축가의 역할은 시뮬레이션 시대에 더 중요해질 것이며, 이를 건축가 스스로 발견하고 찾아나서야 한다”는 주장으로 책을 끝맺는다. 디지털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최종적으로 디자인을 결정하고 책임지는 임무를 수행할 역할이 필요하며, 컴퓨터를 활용하는 고도의 작업 과정에 장인정신이 개입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건축가의 역할이 디지털 기술에 의해 분산되더라도, ‘건축 창의적 사고 능력’을 바탕으로 하는 핵심 역할은 건축가 고유의 영역이라는 굳건한 믿음이 전제된 것이다. 따라서 ‘도면의 죽음’은 ‘건축가의 역할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이 문제에 대해 경각심을 일깨우고 활발한 토론과 담론의 장을 이끌기 위한 화두라 할 수 있다.
방: 이 책이 지금 우리 건축계에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이라 생각하나? 번역자로서의 바람이 있다면?
이: 경제성, 효율 등 ‘성능’을 바탕으로 하는 시뮬레이션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건축 프로젝트는 클라이언트, 디벨로퍼, 시공자 등 다양한 주체들과의 경계 없는 협업을 요구받고 있다. 서로의 역할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건강한 담론의 장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다. 이를 위해 건축 교육에서부터 설계, 이론, 시공, 기술 분야가 힘을 모아 새로운 협업의 시대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한편, 디지털 기술의 발달 속에 정량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가치’ 문제와 윤리적 판단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건축가’의 역할과 리더십을 우리 스스로 정의하고 적극 모색해야 할 때라고 본다.
▲ SPACE, 스페이스, 공간
ⓒ VMSPAC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