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모터를 통해 나는 더 이동적이 될 것이다.▼1
1.
마포구에서 강남으로 출퇴근하던 시기가 있었다. 선릉역의 어느 대기업 인턴으로 일할 때였는데 합정에서 2호선을 탔다. 지하철을 탈 때마다 생각했다. 출퇴근 시간도 노동시간에 포함해야 한다. 고용주 입장에선 씨도 안 먹힐 소리겠지만 나는 진지했다. 나인 투 식스라는 정해진 시간에 근무하길 원한다면 그 시간을 지키기 위해 이동하는 시간과 노력도 회사에서 책임져야 한다고 말이다. 물론 아무도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마포구에서 파주출판단지로 출퇴근하던 시절에도 비슷했다. 처음에는 광역버스를 탔고 이후에는 자차를 이용했는데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 거대한 낭비는 뭐지. 왜 모두 같은 시간에 차를 끌고 나와 교통체증에 시달리는 걸까? 이런 제도를 만든 사람은 정신이 좀 이상한 게 분명하다. 반면 내 말을 들은 어머니는 니 정신이 더 이상하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남자라면 모름지기 자기 차를 타고 아침저녁 출퇴근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게 제대로된 어른이라고 믿으셨다.
이스탄불의 출근시간 교통문제를 민족지적으로 연구한 베르나 야지지는 교통을 “도시 불평등이 일어나는 사회적 장소”라고 분석했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있는 이스탄불은 교통체증으로 악명 높다. 매일 아침 100만 명이 넘는 통근자들이 두 대륙을 잇는 다리를 이용하는데 계층에 따라 이동수단이 상이하다. 일용직은 트럭 짐칸에 실려 이동했고 직장인은 만원 버스를 탔으며 부유한 사람들은 자차를 이용했다. 흥미로운 건 계급의 극단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최상류층은 교통체증을 피해 헬리콥터로 이동하거나 구급차-택시로 도시를 가로질렀다. 구급차-택시는 최상류층이 소유한 개인 구급차를 일컫는 말이다. 반면 빈민층은 그냥 걸어다녔다. 도시의 치안이나 날씨 등 궂은 환경에도 불구하고 걷는 것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한쪽은 도시 교통을 면제받았고 다른 한쪽은 배제당했다.▼2 그러니까 요약하면 이동(수단)은 정체성이자 권력이며 이데올로기다.
2.
요즘 나의 이동 경로는 대부분 마포구로 한정된다. 마포구청에서 합정이나 망원 또는 연희동으로 이동하며 공유 자전거나 킥보드를 이용한다. 버스나 자동차보다 빠르고 간편하지만 자동차들의 위협을 받거나 사람들의 눈총을 받는 건 피할 수 없다. 특히 킥보드에 대한 법령이 제정되고 미디어의 선정적인 기사가 나온 이후로는 죄인이 된 기분이다. “전동 킥보드 사고, 3년간 8배 급격히 증가”▼3, “박명수, 촬영 중 ‘난폭 운전 킥보드’에 사고 당할 뻔 ‘아찔’”▼4 하루가 멀다 하고 나오는 기사에서 킥보드는 거리의 폭군이자 흉기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뭔가 이상하다. 정말? 킥보드가 그렇게 위험해? 자동차가 위험한 게 아니고?
지리학자 팀 크래스웰은 이동이 세 가지로 구성된다고 말한다. 첫 번째, 물리적 이동. 두 번째, 이동의 재현. 세 번째, 이동의 체화되고 경험된 성격.
두번째 이동의 재현에서 이동은 항상 국가나 기관, 미디어에 의해 좋은 이동 방식과 나쁜 이동 방식으로 구분된다. 일반적으로 개발도상국은 철도나 자동차를 좋은 이동 방식으로 재현하고 선진국은 걷기를 좋은 이동 방식으로 재현한다. 이러한 재현의 양상을 따라 킥보드는 기존 질서를 위협하는 악이 된다. 누가 저들에게 도로와 인도를 점거할 권한을 줬는가! 킥보드를 쫓아내라! 그러나 진짜 문제는 시속 20km로 달리는 자그마한 킥보드가 아니라 자동차다. 사상 사고를 내는 것도, 인도를 잠식하고 환경을 오염시키고 미관을 해치는 것도 자동차다. 누가 자동차에 그런 권한을 줬을까?
한국에선 자동차가 왕이다. 자동차 권력이 너무 심하다 보니 그게 권력인지도 모를 지경이다. 이런 현상을 자연화라고 한다. 이데올로기가 상식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성애나 가부장제처럼 말이다.
민식이법과 관련된 논쟁도 자동차 권력과 함께 생각할 수 있다. 민식이법은 어린이보호구역의 안전을 강화하기 위해 제정된 법이다. 법 시행과 동시에 청와대 국민청원에 민식이법의 폐지를 요구하는 글이 올라왔다(2020년 3월 23일 “민식이 법 개정을 청원합니다.”). 35만 명의 지지를 받은 청원의 요지는 가중처벌이 형평성에 어긋나며 운전자를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익명의 운전자들은 민식이법 놀이를 근거로 든다. 초등학생들 사이에 운전자를 골탕 먹이려고 차에 뛰어드는 놀이가 유행이란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초등학생들은 자해공갈단보다 더한 악질이다. 이런 제목의 기사도 있다. "학교 앞에서 차 만지면 용돈…'민식이법 놀이' 공포 확산”▼5 물론 이 놀이가 사실로 규명된 사례는 없다. 이렇게까지 민식이법과 어린이들이 혐오받는 이유는 뭘까. 운전자가 스스로를 피해자로 생각하는 사고 방식은 묘하게도 성범죄와 관련된 남성들의 피해의식과 닮아 있다. 모든 남성을 잠재적 성범죄자로 간주하지 말라는 식이다. 코로나, 경제 위기 등과 겹치며 심화된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혐오와 상상적 위협에 대한 공포는 이동 권력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3.
자동차가 점점 나쁜 이동 방식으로 재현되고 있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다행이다. 언론이나 미디어, 국가에서도 걷기와 자전거를 권장하고 좋은 방향으로 재현한다. 그러나 사실 요점은 어떤 이동 방식이 좋다 또는 나쁘다에 있지 않다. 자동차를 지나치게 악마화하는 것 역시 한쪽 측면만 보는 것이다. 자동차는 여성의 권력을 신장시키고 젠더 위계를 뒤흔드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델마와 루이스>가 가장 유명한 사례다. 닐 아처는 이 영화가 정체성, 욕망, 쾌감에 대한 복합적인 질문을 탐색할 가능성을 보여주었다고 주장한다.▼6 인종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1960년대까지 흑인이 운전하는 건 손가락질 받는 행위였지만 새로운 경제적 위치를 획득한 흑인 부르주아들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냉전용으로 기획한 주간고속도로를 타며 자유를 만끽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선주민과 백인 정착민 사이의 갈등에서도 자동차는 복합적인 재현의 양상을 띤다. 모빌리티는 식민지 설립의 주 요소였다. 백인들은 선주민 집단을 자동차를 두려워하는 미개인으로 재현했지만 실제 선주민들은 자신들만의 자동차 문화를 만들어냈다. 선주민 무루뮤 왈라바라는 저항의 의미로 부족의 번호판을 단 차를 타고 수도 캔버라에서 드라이브 할 것을 선언했다. 자동차 권력을 재맥락화한 것이다.▼7
모빌리티는 제도와 산업, 젠더, 인종, 계급 등이 교차하는 네트워크다. 이러한 네트워크 속에서 이동은 재현에 속박되는 동시에 재현을 뛰어넘기도 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산책을 찬양한 만큼 자동차의 움직임도 찬양했다. 그의 관심은 다양한 모빌리티의 어울림이었다. 앤드류 대커는 울프의 모빌리티가 “양성구유적 정신의 유동성과 연결되어 있다.”▼8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다양성이 존중받는 평등한 사회를 원한다면 이동 수단 역시 평등해져야 한다. 하나의 수단이 아닌 여러 장치를 갈아타며 이동하기. 어쩌면 이러한 움직임의 교차가 우리의 정체성을 더 유연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여러 이동 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더 다양한 사람들과 접촉하고 더 내밀한 도시 풍경과 마주친다는 의미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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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피터 애디, 『모빌리티 이론』, 최일만 옮김, 앨피, 2019
2 리브 커 야퍼 외, 『도시 인류학』, 박지환 외 옮김, 일조각, 2020
3 정명진, ‘전동킥보드 사고, 3년간 8배 급격히 증가’, 「파이낸셜뉴스」, 2021년 7월 3일.
4 장구슬, ‘박명수, 촬영 중 ‘난폭 운전 킥보드’에 사고 당할 뻔 ‘아찔’’, 「이데일리」, 2021년 7월 3일.
5 정지은, ‘"학교 앞에서 차 만지면 용돈"…'민식이법 놀이' 공포 확산’, 「한국경제」, 2021년 7월 6일.
6 닐 아처, 「길 위의 장르」, 『모빌리티와 인문학』, 피터 메리만 외 엮음, 김태희 외 옮김, 앨피, 2019
7 「오스트레일리아-훔친 차처럼 운전하라」, 『모빌리티와 인문학』, 피터 메리만 외 엮음, 김태희 외 옮김, 앨피, 2019
8 피터 애디, 『모빌리티 이론』, 최일만 옮김, 앨피, 2019
▲ SPACE, 스페이스,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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