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 이해, 친절, 품격. 정재헌(경희대학교 교수)이 건축을 이야기할 때 거듭 언급하는 단어들이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가는 세계를 비가시적이고 추상적인 가치로 설명한다. 이렇게 부유하는 언어들과는 대조적으로 그의 건축은 굉장히 정교하고 구체적이다. 원하는 빛을 얻기 위해 벽의 두께와 개구부의 위치를 오차 없이 설정하고, 유난스럽지 않은 방식으로 리듬감을 만들고자 하나의 재료를 조금씩 다르게 사용하고, 심지어 커튼의 바느질 땀까지 섬세하게 매만진다. 이러한 크고 작은 건축적 선택을 그러모아, 사람들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손으로 꽉 잡아 쥐어준다. 추상적 가치를 적확한 세계로 빚어나가는 그의 건축을 따라가보자.
인터뷰 정재헌 경희대학교 교수 × 김정은 편집장
집
김정은(김): 두물머리 주택(1998)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총 25채의 주택을 설계했다. 저마다 위치, 규모, 가족 구성, 요구 사항 등이 모두 다르겠지만 이들을 관통하는 핵심이 있을 것 같다. 집을 설계할 때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는 부분은 무엇인가?
정재헌(정):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보다 근본적인 것들이 떠오른다. 집은 디자인 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용자에 대한 이해가 가장 중요하다. 설계 시작 순간부터 건물이 완공될 때까지 건축주와 긴밀하게 대화하고 소통하며 건축주를 관찰한다. 왜 집을 지으려고 하는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갈지, 시간이 흘러 나이가 들었을 때 어떻게 공간을 사용할지, 심지어는 건축주가 집을 떠난 다음 누가 다음에 살 지까지도 고민한다. 건축주의 삶을 장기적으로 바라보며 그 삶을 어떻게 다루고 담을지를 고민한다.
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로 사람들이 집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졌다. 집의 중요도가 높아진 만큼 집의 본질에 대해 더 깊게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지금의 시대 상황에서 집에 대해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정: 코로나19보다 더 과거로 가보면, 과연 지금의 우리가 2000년 전 사람들과 크게 다를까? 땅에 발을 딛고, 자연의 물소리를 듣는 것과 초록을 보는 것을 좋아하고, 해가 뜨고 지는 것에 따라 생활하고, 나이가 들면 노쇠하여 행동반경이 줄어드는 등 근원적인 것들은 바뀌지 않았고 앞으로도 여전할 것이다. 다만, 과거보다 거주환경의 밀도가 높아진 것이 차이점이다. 코로나19도 고밀도 사회의 현상이자 후유증이란 생각이다. 고밀도 사회에서 서로 부딪히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에 대해 이전부터 고민해왔다. 이에 대한 해답으로, 집에서도 일정한 거리를 두는 영역성을 확보했다. 외부 공간을 집 내부로 끌어 들여 인간적인 규모의 공간감을 만들어내는 일을 이어오고 있었는데 마침 코로나19 시대와 잘 맞아떨어진 것 같다. 건축주들이 재택근무 하기에도, 지인들을 초대하기에도 참 좋은 집이라고 하더라.
김: 파주주택(2020)과 운중동 친구네집(2021)은 곳곳에 전이 공간이 있다. 집이 여러 채로 나뉘어 있어 이곳을 통해 저곳으로 갈 때 기꺼이 외부 공간을 통과해야 하고, 공간과 공간 사이에 좁고 긴 복도나 계단이 있어 작은 여정을 겪어야 한다.
정: 작은 집일수록 품격이 있어야 한다. 급작스럽게 전환되지 않는 공간, 다음을 예측할 수 있고 영역과 영역 사이에 적당한 거리가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그러려면 전이 공간이 필요하다. 운중동 친구네집이나 파주주택에는 가로와 안마당 사이에 지붕 밑 진입 공간을 크게 뒀다. 이곳이 집과 밖의 자연스러운 경계다. 집 안에서도 안마당을 중심으로 채 사이나 영역 사이에 적당한 외부 공간을 두어 가족 구성원들이 적당한 거리감을 두고 서로 소통할 수 있고, 각자의 출입 영역을 가질 수 있다. 마당 중심으로 매개 공간이 연결되어 각자의 움직임을 넌지시 보고, 우연히 만나고, 이야기하는 장소가 된다.

운중동 친구네집 ⓒPark Youngchae
신도시에 대한 단상
김: 파주주택과 운중동 친구네집 모두 서울 근교 신도시의 주택단지에 위치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차이점도 있을 것 같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판교와 파주, 두 신도시의 차이가 체감되었나?
정: 파주는 판교보다 10년 뒤에 계획됐다. 판교 주택지는 70평 단위로 분할된 고밀도 주거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전원도시를 지향하고 있는 반면, 파주 교하지구는 전원도시의 밀도와 대지 규모를 가지고 있다. 두 배 크기의 집 터, 느슨한 법적 규제, 지형을 담은 가로망, 단지 내에서의 밀도 차이 등은 판교와 다른 여유로운 동네 풍경을 만든다. 판교는 극단적이고 현실성이 없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이거나 단독주택을 위한 70평짜리 깍두기 필지다. 중간이 없다. 70평 대지 위에 건폐율, 건축한계선 등의 규제들을 고려해 집을 지으려면 우리가 상상하는 전원주택이 불가능하다. 완성된 시점에서보면 판교는 아파트, 주택, 상가, 학교, 가로, 개울, 산이 어우러지기 보다는 객체로 인식되고 모델하우스가 나란히 이어진 삶이 없는 듯한 풍경이다.
김: 지금과 같은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는가? 해결의 실마리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정: 사회의 밀도가 높아지는 과정에서 한국이 자생적으로 만들어온 도시의 유형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가회동, 북촌 등의 도심한옥주택지가 선례가 될 수 있다. 주변 환경에 따른 여러 크기로 필지를 나누고, 필지의 크기와 대지 조건에 따라 ㅡ자, ㄱ자, ㄷ자, ㅁ자 집을 배치하고, 채나 담장이 가로와 집의 경계를 만들어 좁은 골목에서 대문이 서로 마주하지 않게 두는 등 도시계획에 대한 건축적 해법을 다양하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신도시를 계획할 때에 우리 삶의 모습을 좀 더 섬세하게 들여다보고 스스로를 알아가는 과정이 선행되기를 희망한다.

파주주택 ⓒPark Youngchae
동서양, 생활과 인식의 차이동서양, 차이
김: 프로젝트들을 보면 마당, 정원, 중정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외부 공간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데, 내외부 공간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자 하는가?
정: 유럽의 도시들을 보면, 건물의 밀도는 높이고 건물들로 둘러싸인 공간은 비워서 광장이나 공원으로 작동하게 한다. 그 방식을 그대로 한국에도 일반화하려고 하는데, 활용이 잘 안된다. 당연한 일이다. 한국의 옛 동네, 옛 집은 아무리 작은 집이라도 모두 마당을 품고 있었다. 자기 영역 안에 외부 공간을 두었다. 그곳에 세상을, 우주를 담았다. 우리나라의 외부 공간은 서양의 것과는 달라야 한다. 또 서양은 신발을 신고 집 안을 돌아다니지만 한국은 맨발로 거닌다는 점도 중요한 차이다. 이 신발의 유무에 따라 집의 외부 공간의 이용 빈도가 결정된다.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갔는데, 다시 신발을 신고 나가야 하는 마당이 있다면 잘 사용하지 않게 된다. 바라보는 정원에 그치고 만다. 우리나라 아파트의 발코니가 잘 사용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슬리퍼를 신어야 갈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에 창고가 되거나, 아예 발코니 확장을 해서 반외부 공간을 없애버린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외부 공간을 잘 사용할 수 있을까? 집에 있어서 가장 먼저 외부 공간을 두고, 그다음에 실내 공간과 연계되면 된다. 예를 들어 아파트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자신만의 작은 마당을 접한 다음 실내로 들어가는 식으로 할 수 있다. 이번에 선보이는 네 개 프로젝트도 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바로 정원이 있어서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외부 공간을 갖게 했다.
김: 건물에서 생성되는 장면들의 중첩을 ‘사이’의 풍경, ‘간극’의 투명한 연결이라고 표현한 바 있는데, 불투명한 물질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투명성에 대한 설명을 부탁한다. 서양 건축의 투명성과 한국 건축의 투명성에 대한 생각도 녹아 있는 것 같다.
정: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건축은 서양의 인식체계에 근거한다. 그렇게 건축 교육을 받았고 그것이 마치 정답인 듯, 교훈인 듯 다뤄왔다. 지금은 의문을 가져야 하는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보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투시도에 근거한 시각이 근대에 들어서 투과성, 겹침 등의 큐비즘적 시각으로 발전했다. 이 변화는 건축과 공간을 인지하는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르네상스 시대의 건물은 파사드가 강렬하게 서 있고 내부는 투시도법에 근거해 대칭으로 전개된다. 반면에 근대에 들어서는, 벽이 구조에서 자유로워지면서 단일 공간 내에서 다양한 공간구성이 가능해지고 시퀀스가 생겼다. 르 코르뷔지에의 빌라 사보아(1931)가 현대건축의 표상으로 꼽히는 이유가 그러하다. 내가 개인적으로 꼽는 서양 현대건축의 근원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로비 하우스(1909)다. 건물의 전면으로 진입하지 않고 돌아서 들어가게끔 하는 공간 전개에서 특히 그렇다. 내가 보기엔 굉장히 동양적인 사고다. 사찰에 가면, 저 멀리 눈으로 건물은 보이지만 바로 향할 수 없고 굽이굽이 여정을 겪으면서 가야 한다. 그 시퀀스가 르 코르뷔지에가 동방여행에서 아크로폴리스에서 한 경험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미 우리 전통건축에 녹아 있던 것들이다. 채를 나누고, 지붕을 들어 올리고, 처마와 벽 사이에 틈을 두고 그로 인한 중첩과 겹침의 장면들. 근대건축의 공간의 깊이가 벽면에서 벗어난 자유로움에 의한 투명성과 겹침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내가 말하는 것은 입체나 볼륨으로 만들어진 사이 공간이다.

디파이 사옥 ⓒYoon Joonhwan
다른 성격의 집
김: 사옥, 레스토랑, 병원, 학교, 인테리어 작업을 ‘다른 성격의 집을 설계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첫 호텔 프로젝트인 나무 호텔(2021) 또한 집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는가? 그렇다면 집의 어떤 공간적 특성이 어떻게 호텔로 변주되었나?
정: 나는 “호텔을 20년 동안 설계했다”고 이야기한다. 호텔에 가면 아무리 시설과 전망이 좋을지라도 즐거움이 채 5분이 가질 않는다. ‘오션뷰’를 잠시 감상하고 나면 TV보거나 차 마시거나 잠 자는 게 전부다. 잠을 자는 공간이 아닌 머무르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봤다. 나무 호텔은 내가 앞서 설계한 아치울 주택(2017)과 닮아 있다. 지상 3층 규모의 단독주택인데, 1층은 자녀 공간, 2층은 가족 공간, 3층은 부부 공간으로 분리하고 층마다 다른 성격의 외부 공간을 둔 것이 특징이다. 외부 공간이 층마다 있어서 3층에서도 마치 1층과 같은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작은 주택의 축소판들이 3층 규모로 쌓인 셈이다. 같은 방식을 나무 호텔에도 적용했다. 호텔이 위치한 지역의 주변 환경으로부터 전환이 서서히 일어날 수 있도록 진입 동선을 길게 끌어서 시퀀스를 만들었다. 로비와 엘리베이터 그리고 복도의 전이 공간을 지나서 당도하게 되는 객실은 마치 집처럼 굉장히 자유롭고 다양한 움직임이 가능한 공간으로 계획했다.
김: 디파이 사옥(2020)을 통해 오피스의 개념이 ‘기능’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바뀌었음을 짚었다. 사람 중심의 오피스란 구체적으로 어떤 공간을 의미하는가?
정: 기업의 웹사이트를 디자인하는 회사다. 30대의 젊고 자유로운 영혼들이 근무하는 곳이라 자유롭기를 바랐다. 오피스에서 자유롭다는 건 사람들이 어디든지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좋아하는 장소에서 근무하고, 원할 때 창문을 열 수 있고, 편하게 외부로 들락거릴 수 있으며, 이동하면서 풍경과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장소마다 각각의 매력을 극대화하고자 했다. 하나의 오피스에 모여 집단적으로 근무하는 게 아니라 생활하듯이, 마치 집처럼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장소를 만들고자 했다.

나무 호텔 ⓒPark Youngchae
물성과 태도
김: 이번에 선보이는 프로젝트 네 개 모두 벽체가 두껍다. 그래서 충분히 단열을 하고, 창호 디테일을 해결하고, 표면을 따라 빛이 흐르거나 그림자가 드리워질 수 있다. 이렇듯 벽 하나를 계획할 때에도 장면, 분위기, 역할 등 여러 사항을 고려할 것 같은데, 물리적 결과물이 나오기까지 어떤 고민의 과정을 거치는가?
정: 나는 조형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것을 싫어한다. 형상이 뚜렷하면 자기완결성이 강하다. 내가 요즘 하고 있는 건축은 ‘형상이 없는 건축’인 듯하다. 어떤 환경과도 어떤 주변과도 잘 어울리는, 스스로를 강하게 드러내지 않는 태도를 추구한다. 벽돌을 선호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음매 없이 형태가 두드러지는 노출콘크리트와 대조적이다. 벽돌은 중력을 순수하게 표현하는 재료이고, 이렇게 작은 중력들이 모인 중력감을 그대로 드러내고자 한다. 그러려면 얇은 스킨이 아닌 적당한 두께를 가진 볼륨이 적합하다. 또한 발코니나 테라스 등을 돌출하지 않고 안으로 들여서 외부가 안으로 침투되도록 하여 내외부 공간의 경계가 완충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동시에 자연빛이 두꺼운 벽체를 거쳐 바닥에 깔려 실내에 편안한 분위기가 조성되도록 만든다. 부가적으로 붙박이장을 둔다든가 단열을 충분히 두는 등의 기능적인 장점도 있다. 이렇듯 벽에 선 하나를 그으면서 다양한 생각을 담는다.
김: 이전 프로젝트들에 비해 재료의 개수는 줄어든 반면 그 디테일이 풍부해진 느낌이다. 이번에 선보이는 프로젝트들에서도 하나의 재료를 다양한 방식으로 쓰면서 섬세한 대비를 보여주는데, 어떤 의도인가?
정: 산업화 이후에 형성된 우리 도시의 경관은 다양함을 너머 혼란스럽다. 내가 설계하는 건축물이라도 차분하게 서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되도록 하나의 재료로 통일해서 단순하고 고요한 집을 만든다. 마치 도시의 흡음재처럼. 최근에는 벽돌을 선호하는데, 나는 벽돌을 ‘땅의 아들’이라고 생각한다. 그 흙냄새가 더 진하게 나길 바라며 벽돌 중에서도 고벽돌을 주로 사용한다. 최근에 제작된 벽돌은 1200도 이상의 고온에서 구워서 물성이 매끈하고 통통 튄다. 전통 방식으로 제작한 벽돌은 그보다 낮은 800도에서 구워 보다 흙에 가깝고 편안하고 자연스럽다. 주변 환경과 집의 규모에 따라 쌓기 방법이나 표면의 질감 그리고 크기를 조금씩 달리하고 있다. 예를 들어 파주주택과 운중동 친구네집의 경우 내외부 벽면마다 벽돌의 조합 방식을 달리해 주택의 스케일에 맞게 섬세한 표정을 만들고자 했다. 나무 호텔은 변주의 단위 크기를 더 크게 삼아서 도시 스케일에 대응했다. 마치 흑백이 컬러보다 더 풍부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듯이 단일 재료로도 다양하고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음을 느끼고 있다.
▲ SPACE, 스페이스,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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