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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베니스비엔날레_국가관

글
배윤경(건축 칼럼니스트)
background

참가국만 50여 개국(총 전시에는 65개국)에 달하는 상당한 규모의 전시는 19세기 조선소를 활용한 아르세날레와 녹지로 둘러싸인 자르디니(giardini=garden)에 흩어져 있다. 자르디니가 제1세계 국가 중심의 독립된 파빌리온들로 구성된다면, 아르세날레는 주제전을 관람한 이후 조밀하게 나뉜 전시관을 거쳐 최종적으로 가장 인적이 드문 곳에 위치한 이탈리아와 중국을 만나게 되는 과정이다.

 

일본관

제일 먼저 한국관을 가는 길에 마주친 일본관을 먼저 들렸다. 총 지휘는 아틀리에 바우와우의 공동설립자이자 취리히 공과대학교(ETHZ)의 교수로 재임 중인 모모요 카이지마가 맡았다. 전시 오픈 이전에 이미 ETHZ의 교수들을 참여 작가로 선정했다는 소식을 듣고 현대건축의 텍토닉한 측면으로 각광받는 스위스 건축가들과의 교류에 기대가 컸다. 하지만 막상 전시는 그러한 예상을 뒤엎었다. 참여 작가만 40팀에 이르며, 전시물은 과거에 생산한 드로잉들로 한정된다. 입체적 사물 없이(레고 모형이 있긴 했다) 오직 드로잉만으로 채운 전시라 어떤 의미에서는 놀라웠다. 〈Architectural Ethnography〉라는 주제에 걸맞게 선정된 드로잉은 정확한 구축을 위한 시각 자료가 아니라, 서도호 작가의 액소노메트리 ‘My Home’이나, 미로처럼 이어진 홍콩의 실내 공간을 매핑한 『Cities without Ground』처럼 건축을 둘러싼 인간의 삶을 함께 묘사한 기록들을 대상으로 한다. 벽면에 적은 친절한 안내에 따르면 관람객의 모범적인 감상은 다음과 같다. 관람객은 드로잉을 선택하고, 그곳에 자신의 삶을 대입한다. 나아가 선 두께, 표면의 색, 시점, 종이의 품질을 관찰하며 드로잉 표현 방식 자체를 들여다본다. 그러다 지치면 아래 야타이(屋台) 마켓으로 내려가 자신만의 그림을 그린다. 근래의 일본 건축가들이 암암리에 퍼트린 영향력이라면 치수, 재료, 디테일 등이 기술된 건축 도서에 구체적인 ‘생활’을 병치한 것이다. 아틀리에 바우와우의 『Graphic Anatomy』와 같은 도면집에 구체적이고 다양한 식물군, 그리고 이를 가꾸는 사람의 모습을 함께 넣었다. 건조하고 중성적인 캐드 도면은 하나의 귀여운 일러스트가 된 셈이다. 도면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라고 전시장에 비치한 확대경은 관람객의 수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고, 무엇인가 보라고 의도한 전망대와 쌍안경은 이렇다 할 효용이 없어 시도한 이를 머쓱하게 한다. 하지만 그 모든 상황을 멀리서 바라보면 한 편의 ‘카와이’한 풍경이다. 필로티의 하부 공간은 일본식 포장마차인 야타이가 놓였고 이들은 도록 판매용 매대나 그림 도구를 가져다 놓았다. 비엔날레에서 일본이 준비한 야심찬 전략은 무엇인지,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지 비장한 각오로 임한 사람들에게는 맥이 풀리는 전시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현학적인 접근이 아니라 가족 단위의 비건축계 종사자들도 찾는 장소임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렇게 친밀하게 대응하며, 발음하기 쉬운 일본어의 장점을 살려 전통 공간을 묘사한 단어를 슬며시 밀어 넣는 꾸준함이 무섭다.(우리가 포장마차라고 발음하게 하면 외국인에게 얼마나 어렵겠는가!) 『메이드 인 도쿄』, 『펫 아키텍처 가이드북』을 선보인 아틀리에 바우와우라면 이러한 전략이 충분히 이해된다.

 

일본관_ 〈Architectural Ethnography〉라는 주제에 걸맞게 선정된 드로잉은 정확한 구축을 위한 시각 자료가 아니라, 건축을 둘러싼 인간의 삶을 함께 묘사한 기록들을 대상으로 한다. ©Andrea Sarti/CAST1466, Image courtesy of the Japan Foundation

 

영국관

영국, 스위스, 노르딕 3국(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그런데 핀란드는 알바 알토가 설계한 자국 파빌리온이 또 있다)은 이번 비엔날레의 주제를 가장 영악하게 해석한 팀들이다. 특히 영국은 자유공간(Freespace)이라는 주제에 천연덕스럽게 대응한 문제 국가다. 파빌리온에 비계로 지지하는 옥상 데크를 설치하며 건설적인 태도를 외부로 드러냈으나 정작 전시장 내부에는 아무것도 없다. 은유적인 비움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텅 빈 공간을 전시했다. 노장 사상과 상통하듯 빈 공간은 다른 무엇인가가 채워질 가능성이라는 역설이다. 발 디딜 때마다 삐거덕거리며 공간을 채우는 소리, 정체된 공기, 그리고 지난 전시에서 벽을 사용했던 흔적을 그대로 둠으로써 환기하는 기억을 굳이 셰익스피어의 희곡 ‘폭풍우(The Tempest)’의 한 구절을 들어 정당화할 정도로 대범했다. 영국관의 감독인 카루소 세인트 존은 적막한 풍경으로 치환한 시(poetry)에 ‘섬(Island)’라는 제목을 걸었다. 무슨 영문인가 어리둥절하며 평소에 없던 옥상 데크로 올라간 관람객은 두 번 놀란다. 역시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대신 따가운 오후 햇살과 아름다운 지중해가 맞이한다. 한산한 옥상은 혼잡한 전시장의 도피처를 자처했다. 섬 안의 섬이다. 이를 대변하듯 전시장 내부의 채광을 담당하는 박공지붕이 데크 한가운데에 비죽 솟아올라 철마다 홍수로 물에 잠긴 베니스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데크 바닥에는 광장의 패턴을 옮겨 사교와 이벤트의 공간이 되면 좋겠다는 뜻을 드러내며 오후 4시마다 방문객에게 차를 제공한단다. 물론 텅 빈 공간이 주는 날것의 감각을 부정하지 않는다. 전세 계약이 끝나면 2년마다 이사를 가야 하는 한국의 세입자로서는 이삿짐센터가 살림살이를 들어낼 때마다 본인의 생활공간이 얼마나 낯설어지는지 잘 알고 있다. 온전히 구조체만 남은 상황에서 마치 벽이 얇아진 듯 사람이 내는 소리가 상대적으로 크게 울리던 경험이 떠올랐다. 역사에 단 한 번 뿐일 수밖에 없는 기회를 이번 감독들이 가로챈 것은 틀림없다. 이제 두 번 전시장을 비우는 일은 용납되지 않는다. 자유공간(Freespace)을 빈 공간(empty space)으로 해석했으나 관람객들은 무엇인가가 채워져 있기를 기대하고 입장료를 냈다. 그렇다면 무료(free of charge)를 선언하며 2유로씩 현장에서 돌려줬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영국관_ 파빌리온에 비계로 지지하는 옥상 데크를 설치하며 건설적인 태도를 외부로 드러냈으나 정작 전시장 내부에는 아무것도 없다. 은유적인 비움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텅 빈 공간을 전시했다. ©British Council, photographed by Hélène Binet


스위스관

건축 전시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파격적인 형식으로 자답한 스위스 파빌리온은 이번에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며 그 도발적인 의도가 썩 나쁘지만은 않았음을 증명했다. 〈스비체라 240: 하우스 투어(svizzera 240: house tour)〉라는 주제가 드러내듯 모델하우스에 가까울 정도로 아파트 실내를 옮겨와 관람객들의 실질적인 체험에 초점을 맞추었다. 아파트의 주거 유닛은 지나치게 평범하고 흔한, 하지만 20세기 초 독일의 신즉물주의를 주도했던 오토 히슬러의 계획 이후로 수많은 실험을 거쳐 모든 이들의 변덕스러운 주문에서 살아남은 유형이다. 정답에 가까울 정도로 견고하게 자리 잡은 집을 둘러보는 경험이 전부인가 의심하는 순간 문지방을 넘어 전혀 새로운 공간이 등장한다. 변화의 중심은 형태나 물성이 아닌 스케일이다. 240cm 천장고를 기준으로 한 아파트는 1:5, 1:2로 축소되거나 1.3:1, 1.5:1의 비율로 확장된다. 자신의 몸을 기준으로 체득한 스케일 감각을 터무니없게 만드는 방들이 차례로 등장하고 그제야 신체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여행(tour)’의 진의를 깨닫는다. 싱크대가 닿을 수 없는 높이에 있다거나, 문손잡이가 지나치게 크다거나, 3차원 볼륨의 변화에 콘센트까지 포함할 정도로 세세한 주의를 기울였다. 거대한 신체의 유러피언 성인들은 부딪히지 않으려고 머리를 조아리며 어린 시절로 돌아가야 했다. 스스로도 우스꽝스러운 체험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영국관에서 살던 집을 나가야 하는 기분을 느꼈다면, 스위스관에서는 새롭게 정착하는 입장이다. 여타의 생활 흔적은 제거되고, 도면을 그릴 때 실선으로 그리는 요소들만 남은 상황이라 공간 스케일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부분들을 인지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전시를 기획한 감독의 의도는 기성품으로 조립된 중성적인 인테리어에서 최대한 풍부한 감각을 이끌어내기를 바라고 있다. 잉크가 번진 패턴을 어떻게 묘사하는지를 바탕으로 심리 상태를 파악하는 로르샤흐(rorschach) 검사나, 리폴린(Ripolin) 사에서 만든 흰색 페인트로 콘크리트 벽을 미장했던 르 코르뷔지에(마침 둘 다 스위스 태생이다)를 언급하며 현상학적인 공간으로까지 반응을 기대하고 있다.

 


스위스관_ 자신의 몸을 기준으로 체득한 스케일 감각을 터무니없게 만드는 방들이 차례로 등장하고 그제야 신체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여행(tour)’의 진의를 깨닫는다. Photographed by Christian Beutler / KEYSTONE

 

노르딕관

노르딕 파빌리온은 언제나 전시장 자체의 매력으로 관람객을 즐겁게 한다. 그래서인지 올해는 비닐 막으로 제작한 커다란 덩어리 네 개를 둔 것으로 전시를 대신했다. 이들은 천장에서 타고 내려오는 몇 가닥의 굵직한 호스로 연결되며, 가끔씩 우렁찬 소리와 함께 덩어리 내부로 공기와 물이 공급된다. 내부 이산화탄소 농도를 측정하는 센서에 의해 횟수가 조절되는 반응체라는데 크게 와닿지는 않는다.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두 요소, 그리고 자궁과 탯줄의 직설적인 번안은 문명과 도시를 일군 인류가 자연과 공생하기를 바라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네덜란드관

네덜란드는 〈워크, 바디, 레저(Work, Body, Leisure)〉라는 주제를 제시하며 주로 컴퓨터 기술의 발달로 인해 변화한 일상,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이들과 매개한 신체를 다양한 관점에서 조명한다. 오렌지색 캐비닛으로 둘러싼 사각형 실내와 가운데 놓인 긴 의자는 어디에서나 동질화된 탈의실 구성이다. 이곳은 업무 혹은 여가라는 목적에 맞게 자신을 탈바꿈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캐비닛을 하나씩 열어봐야 한다는 콘셉트와 그렇게 열었는데 막상 등장한 콘텐츠는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바를 이해하기에 단서가 부족해서 첫인상은 다소 불친절하다. 그러다 어떤 캐비닛이 문처럼 크게 열리며 뒤에 숨은 공간으로 인도하고, 조금 전의 균질하고 질서정연했던 근대 공간은 좀 더 아기자기하고 경쾌한 분위기로 전환된다. 액자에 건 CG와 장난감처럼 늘어놓은 작은 건축 모형이 전시된 ‘Renderlands’(렌더링과 네덜란드의 합성어)은 건축 렌더링 하청 구조에 대한 이야기이다. 자국의 건축가에 의해​ 디자인되었다 생각하는 건물, 혹은 이를 위해 사전에 필요한 이미지들의 상당 부분은 현장의 햇살 한 번 느껴보지 못한 인도의 노동자로부터 생산된다. 다른 이의 꿈을 대신 꾸는 익명의 노동자들에게 작가는 자신이 희망하는 집은 어떠한지를 묻고, 이를 전시했다. 시뮬레이션(Simulation) 코너에는 바람을 불어넣은 인형들이 널브러져 있다. 작가는 이를 통해 자동차 충돌 시험 시 탑승한 인체 모형처럼 우리가 다수를 위해 디자인을 할 때 과연 누구의 신체를 기준으로 삼아야하는지 질문을 던진다. 르 코르뷔지에가 자신이 만든 모듈러라는 비례체계를 이용하거나, 알브레흐트 뒤러가 정확한 그림을 위해 모델을 앞에 두고 신체의 각 부위에서의 위상을 측정한 것처럼, 또한 인체를 분절한 16세기 에르하르트 쇤의 일러스트처럼 물리적 공간이 신체를 통해 경험되는 한 누군가의 몸은 선택되고, 또 누군가는 배제된다. 스케치업 프로그램을 열면 스티브라는 인물이 스케일의 기준으로 등장하듯 가상세계에서의 시뮬레이션조차도 일단은 한 사람이 모두를 대신한다. 베드(Bed) 코너에서는 베아트리츠 콜로미냐가 암스테르담 힐튼 호텔 902호를 옮겨왔다. 이곳은 존 레논과 오노 요코가 1969년 반전-평화 시위 ‘Bed-In for Peace’를 벌였던 현장으로, 이들은 시종일관 침대에 누워있었으나 동시에 그것은 평화를 위한 싸움이기도 했다. 스마트 폰으로 다양한 업무가 가능한 시대에 일터와 쉼터의 구분은 흐릿해진다. 베아트리츠 콜로미냐는 침대를 수평적 일터라 표현하고, 보란 듯이 자신도 침대에 누워 토크를 진행하기도 했다. 콘스탄트의 ‘뉴 바빌론’을 재해석한 마크 위글리의 전시는 그림 하나로, 단출하지만 의외의 메시지가 숨어 있다. 콘스탄트는 요한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를 신봉하는 작가로서, 그의 ‘뉴 바빌론’ 프로젝트는 노동에서 해방된 인간, 오직 즐거움과 유희를 위한 도시계획이다. 칼뱅주의 전통으로 절제와 근면함을 미덕으로 삼는 네덜란드는 그에게 오히려 기독교에 위배되는 바빌로니아이다. 마크 위글리는 이에 대해 노동이 기계로 완전히 대체된 현실로 화답했다. 실제로 로테르담의 항구는 무인 자동화로 운용되며, 네덜란드는 3D 프린터를 가장 열심히 실험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전시장의 벽에 걸린 콘스탄트의 그림은 사실 복제화이다. 원작을 스캔한 후 기계가 안료를 적층하는 방식으로 유화를 프린팅했다. 붓터치 두께가 반영될 정도로 정교하게 복제된 그림을 거의 대다수의 관람객들은 원본으로 착각하고 전시장 문을 나섰다. 

 

네덜란드관_ 오렌지색 캐비닛으로 둘러싼 사각형 실내와 가운데 놓인 긴 의자는 어디에서나 동질화된 탈의실 구성이다. 이곳은 업무 혹은 여가라는 목적에 맞게 자신을 탈바꿈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Photographed by Daria Scagliola

 

한국관

한국관은 1960년대 국가적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이하 기공)의 역할을 재조명했다. 군사정권의 유토피아를 책임진 젊은 아방가르드라는 모순된 상황에 초점을 맞춰 지금의 여의도, 을지로, 구로구와 같은 지역의 시작점이 된 청사진을 공개하고, 나아가 여전히 강압적인 개발 방식으로 잔존한 망령의 정체를 드러낸다. 전시관 창의 망점을 통과한 자연광과 테라스의 쾌적한 분위기가 제령 의식을 돕는 가운데, 건축뿐 아니라 역사, 문학, 사진, 미디어아트 등 문화 예술 전반을 이끌고 있는 다양한 비저네어(Visionaire)를 초대하며 과거와 달리 수평적이고 민주적인 관계를 이끌어냈다. 한국관에서만 볼 수 있는 독립된 아카이브는 흡사 유적 발굴을 위해 파내려간 갱도를 연상시켜 그 자체로 흥미롭다.

 

바티칸

올해의 화제라면 바티칸의 참가이다. 팔라디오가 설계한 산 조르지오 마조레 뒤에는 위대한 건축만큼 경이로운 자연이 도사리고 있다. 배를 타고 건너가 자갈길을 걸어 공원에 다다르는 과정은 그 자체로 성스러운 공간을 맞이하기 전의 경건한 제의를 닮아 예배당이 있는 장소로 제격이다. 11명의 건축가가 설계한 11개의 예배당은 황금 모자이크 타일을 배경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묘사한 로마네스크의 천장화나 스테인드글라스를 거쳐 오색찬란함으로 신성을 표현했던 고딕의 철학만큼 어떠한 공간으로 신을 현현할 것인지 다양한 해석을 보여준다. 테루노부 후지모리는 토속적인 오두막의 형식을 빌려 종교가 갖는 원초적인 속성을 담았다. 스테인드글라스를 대신한 단순한 색상의 창문, 본능에 따라 수놓은 벽 마감, 나무 구조체에 십자 형태로 붙인 색지에서 원죄를 짓기 이전의 순수했던 인간 정신마저 엿볼 수 있다. 노먼 포스터는 인장력과 압축력을 담당하는 부재들을 적절히 배치하여 구조적인 효율과 그로 인한 미학을 구현했다. 대량생산 가능한 조립식 부재를 지지하는 구조체가 노출된 그 자체로 십자가 역할을 하는, 기능과 상징의 일체가 흥미롭다. 프란치스코 마그나니와 트라우디 펠젤의 파빌리온은 유일하게 전시장의 기능을 담당한다. 스웨덴의 건축가 군나르 아스플룬트가 스코그쉬르코고르덴 공동묘지에 설계한 예배당을 소개하며 작고 충실한 종교 공간의 매력을 전한다. 인위적으로 조작된 기하학과 자연 그대로의 사물을 대비시키며 낯설지만 익숙한 모순된 분위기를 조성해온 스밀리안 라딕은 커다란 유리를 받치는 철근 보와 투박한 콘크리트 기단 사이에 가공하지 않은 나무 기둥을 끼워 넣으며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종의 기적 같은 상황을 만들어냈다. 축소 모형과 도면으로 재현된 간접체험에 피곤했던 관람객들을 치유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제안이다.

 

 

노먼 포스터는 인장력과 압축력을 담당하는 부재들을 적절히 배치하여 구조적인 효율과 그로 인한 미학을 구현했다. Photographed by Alessandra Chemollo ​

 


스밀리안 라딕은 커다란 유리를 받치는 철근 보와 투박한 콘크리트 기단 사이에 가공하지 않은 나무 기둥을 끼워 넣으며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종의 기적 같은 상황을 만들어냈다. Photographed by Alessandra Chemollo 

 

국가관 전시는 총감독이 제시한 주제에 대한 화답일 수도 있고, 주제전과는 차별되는 독자적인 행보일 수도 있다. 그 불명확한 성격이 어쩌면 국가관의 존재가 갖는 의미일 것이다. 시원한 그늘막을 제공한 ‘클라우드 빌리지(Cloud Village)’와 같이 알고리즘을 이용한 설계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3D 프린팅 기술을 접목한 중국, 플로터를 이용해 수공예적인 제작이 동반되는 막구조의 한계를 극복한 덴마크와 같은 실험은 매년 꾸준히 등장하는 소재들이다. 미국관의 한 면을 메운 돌바닥은 운송하던 목화솜을 미시시피 강에서 육지로 내리던 멤피스 지역에서 직접 가져왔는데, 이 평범한 포장석은 흑인 노예로 성장한 역사의 증거다. 동시에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공존하는 사회에서 시비타스(civitas)와 모뉴먼트는 어떤 가치를 담아야하는지에 관한 질문이기도 하다. 비록 구체적인 답이 없더라도, 좁은 의미의 건축과 당장의 연관은 어렵더라도 다양한 시점으로 관람자의 시선을 옮겨주는 일은 중요하다. 독일이나 프랑스와 같이 완공된 프로젝트를 수평적으로 나열한 정직한 전시도 여전하다. 혹은 베네수엘라나 오스트리아처럼 출품한 전시 보다는 위대한 건축가가 남긴 전시관 자체를 즐기기 위한 방문일 수도 있다. 그러한 가운데, 관람객들은 세세한 모든 부분을 사진으로 기록하기 위해 연신 스마트폰 화면을 누르고, 매개되는 가상공간이 횡행하는 가운데 모형과 도면, 텍스트와 도록에 의한 전통적인 방식의 전시가 여전히 유효한지 또한 계속 두고 볼 일이다.​ <진행 박세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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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윤경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와 네덜란드 베를라헤 인스티튜트를 졸업했다. 현재 대학에서 건축 설계와 이론을 강의하고 있으며, 여러 미디어에 건축 관련 글을 쓰고 다양한 강의도 한다. 저서로 『어린이를 위한 유쾌한 세계 건축 여행』, 『암스테르담 건축기행』, 『DDP 환유의 풍경』(공저), 『가까스로 반짝이는』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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