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공간)」 2023년 5월호(통권 6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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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을 소환하자면, 압구정동 카페 ‘보디가드’에 처음 들어섰을 때 눈이 휘둥그래졌던 기억이 떠오른다. 널찍한 공간에 배치된 테이블, 대낮처럼 밝은 조명. 어른들이 가던 다방의 낮고 탁한 공기와는 전혀 달랐다. 이것이 1990년대 초반이니 그로부터 30년이 흘렀다. 우리 주변 일들이 그렇듯, 숨막히는 속도로 카페를 둘러싼 실험과 진화가 이어졌다. 이제 카페는 우리 도시에서 주인공 자리를 차지한 듯하다. 주거나 문화시설처럼 건축가라면 한번쯤 도전해보고 싶은 대상이 된 것이다. 도시 어디에나 카페가 있고, 건축가가 공들여 디자인하는 현상. 이제 카페 건축을 우리 건축계의 중요한 장르 중 하나라고 주장해도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카페텍처(cafétecture)’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이 글은 카페 건축의 유형화를 통해 카페의 세계를 이해해보려 한다. 카페계에는 생물이 진화하듯 무수한 변종이 등장했는데, 이를 몇 개의 유형으로 분류하여 그 특징을 살펴보려는 것이다. 주거 건축과 비교하면 아파트라는 장르가 등장한 후 단지형 아파트, 주상복합, 오피스텔로 유형이 세분화되는 과정을 이해해야 비로소 장르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조금 거창하게 이야기하면 ‘카페텍처의 유형(typology)’이라 부를 수 있겠다. 유형학은 카페를 설계하려는 건축가에게 유용한 정보일 텐데, 건축가들은 그동안 등장하지 않았던 새로운 건축 유형을 개발하는 데 열정적이며 그 단서를 기존 건축 유형의 지형도에서 찾아내곤 하기 때문이다. 혹은 당신이 카페를 열고 싶은 건축주라면, 이 글에서 제시하는 유형을 따라가며 참신한 아이디어를 구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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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을 분류하는 첫 번째 기준은 카페의 위치, 즉 도심에 있는가, 교외에 있는가로 정했다. 밀도 높은 도심에, 여유 공간이 있는 교외에, 각각 대응하는 건축의 양상이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 기준은 카페가 우리에게 주는 경험인데 개인적 체험과 타인과의 교류, 두 가지로 나눴다. 독특한 카페 공간에서 머물러보는 경험을 개인적 체험이라 한다면, 카페에서 다른 사람과 만나고 대화하는 것은 교류에 해당한다. 위치와 경험, 이 두 가지 기준을 가로축과 세로축으로 삼으면 카페 유형의 사분면이 생긴다. 도심형 체험과 도심형 교류, 그리고 교외형 체험과 교외형 교류로 말이다.
첫 번째 유형인 도심형 체험 카페를 생각해보자. 이 유형은 방문객에게 신선한 소비 체험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예를 들어 서울 청운동에 위치한 카인드 건축사사무소(공동대표 김우상, 이대규)의 몽재(「SPACE(공간)」 649호 참고)는 차문화를 체험하는 다실이다. 운영자는 여기서 계절마다 예약제로 찻자리를 여는데 손님들은 고요한 분위기에서 차를 음미하고 차의 가치를 새롭게 깨닫게 된다. 물론 이런 소비 체험은 교외 카페에서도 가능하다. 하지만 교외에 비해 상대적으로 점포 면적이 작고, 주변 카페들과의 경쟁 구도 속에 차별화가 필요한 도심에서 자주 등장하는 유형이다. 독특한 체험에 기꺼이 돈을 지불하는 팬층이 필요하므로 도심지에서 더 유리한 방식이라 할 수 있다.또 다른 예로 일본의 디자인 스튜디오 넨도가 설계한 팝업 카페, 가차 가차 커피(본지 122~125쪽 참고)를 보자. 손님들은 원래 장난감을 사기 위해 만들어진 뽑기 기계를 사용하여 커피 원두가 들어 있는 캡슐을 구입한다. 그리고 구매한 원두를 직접 그라인딩하고 드립퍼에 넣고 추출기 버튼을 눌러야 비로소 커피 한잔을 마실 수 있게 된다. 이 카페는 최근 확산되고 있는 무인 카페를 유머러스한 소비자 체험으로 풀어낸 것이다. 독특한 소비 방식에 눈을 번뜩일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카페는 도심지의 고층 건물(모리 타워)에 자리 잡았다. 도심형 체험 카페를 디자인할 때 중요한 것은 고객의 행동을 치밀하게 사전 분석하여 계획에 반영하는 일이다. 소위 ‘행동 설계(behavior design)’라고 하는 방법인데, 공간 설계를 위주로 하던 전통적인 건축가에게는 생소한 영역이다. 도심형 체험 카페의 설계자로 브랜드 전문가, 기획자, 시각 디자이너가 부상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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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유형은 도심에 위치하고 교류의 경험을 주는 카페다. 쉽게 설명하면 동네 단골 카페를 떠올리면 된다. 갑갑한 내 집을 벗어나 책 한 권 읽으려고 나가는 카페, 늘 같은 주인이 웃으며 반겨주고 동네 사람들과 눈인사를 하며 교류가 일어나는 곳이다. 미국의 도시사회학자 레이 올든버그가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하다고 강조한 ‘제3의 장소’가 바로 도심형 교류 카페인데, 이런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건축가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디자인한 예가 많지 않다. 이런 카페는 건축설계나 인테리어 디자인으로 접근하기보다는, 특유의 훈훈한 ‘공기’를 공간에 불어넣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건축가가 주도한 드문 사례로 임태병(문도호제 대표)의 풍년빌라 카페(현 비키초키크로키, 본지 94~99쪽 참고)를 들 수 있는데, 자신이 거주하는 집 1층에서 직접 운영해온 카페다. 따로 소문을 내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이 슬금슬금 모여들어 모임과 행사를 여는 곳이 됐다. 임태병의 말을 빌리자면 “옛날 학교 앞 문방구나 떡볶이집이 하던 역할”을 하는 곳이다. 만약 이런 공간을 건축가가 의뢰를 받아 설계해야 한다면 자신의 건축 어휘를 뽐내기보다는 목소리를 낮추고 교류의 촉매 공간을 만드는 데 집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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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유형은 교외에 위치한 개인적 체험 카페다. 이것이야말로 전통적인 건축가의 활동 영역이다. 여유 있는 부지에서 마음껏 자신만의 건축 언어를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카페와 정원이 공존하는 대구 미래농원(「SPACE」 657호 참고)이 그 예다. 강예린(서울대학교 교수)과 건축사사무소 에스오에이(공동대표 이치훈, 한주희), 디자인 스튜디오 로사이(대표 박승진)가 협업한 이 프로젝트는 건축과 조경 공간을 뒤섞어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지운 작품이다. 순수한 작품으로서의 건축은 건축가가 늘 목말라하는 영역이다. 새로운 공간감, 과감한 구조미, 자연광의 아름다움을 자신의 작품 속에 표현하고 싶지만 한정된 예산, 대지의 제약과 씨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외형 체험 카페에서는 이런 순수한 건축의 표현이 상대적으로 가능하고 심지어 크게 환영받는다. 고객이 환호하기 때문이다.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기 위해 멀리서 찾아온 고객은 이곳만의 독특한 공간 체험을 기대한다. 가로로 긴 창을 통해 보이는 조망, 높은 천장에서 아름답게 쏟아지는 빛은 도심의 일상 속 건물에서는 맛보지 못했던 비일상의 체험을 제공한다. 건축가의 욕망과 사용자의 욕망이 이렇게 맞아떨어진 건축 장르가 또 있을까? 다만 이런 효과를 너무 의도하고 만드는 카페가 늘어나다 보니 인스타그램 건축이라는 비아냥 섞인 반응도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이나 사무실 같은 건축물에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순수한 건축 장르의 아름다움을 대중들이 체험할 수 있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루이스 칸의 소크 연구소를 찾아가서 텅 빈 공간의 미학을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하지만 주말 여행에서 커피 한잔하는 김에, 콘크리트 벽이 태양의 움직임을 장엄하게 가시화하는 풍경을 알아채는 것은 카페텍처가 줄 수 있는 미덕이다. 대중들이 좀 더 쉽게 건축을 이해하도록 돕는 교육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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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유형은 교외형 교류 카페인데, 주민이 모여 지역을 활성화한다는 취지가 담겨 있다. 지역 활동가 최승용(헤테로토피아 대표)이 운영하는 남해 돌창고(「SPACE」 613호 참고)가 좋은 예다. 오래된 창고를 개조한 이 카페는 지역 주민들이 자주 오도록 이용 금액을 할인해준다. 지역에서 생산된 고구마를 사용해서 디저트를 만들고 직원은 고향 출신을 우대해서 이들을 보고 오는 단골손님을 모은다. 지역에서 생산과 소비의 선순환이 이뤄지도록 하는 것이 남해 돌창고의 목표다. 지역 주민의 교류를 넘어 주민과 방문객의 교류를 염두에 둔 카페도 있다. 건축가 하세가와 고가 일본 나라현의 산속에 지은 요시노 삼나무집(2017)이 그렇다. 여행객을 위한 숙박시설인데, 1층에 카페를, 2층에는 침실을 두었다. 카페는 마을 사람들이 번갈아가며 운영하는데, 아침에 여행객에게 커피를 대접하면서 지역의 이야기를 건넨다. “주민과 여행객이 쉽게 다가오도록 문턱을 낮춰주는 것이 카페”라고 최승용은 의미를 부여했다. 마을 회관 앞에서, 여행 안내소 앞에서 머뭇거리던 사람들이 카페의 낮은 문턱을 넘어와 마을 사람들과 만나고 여행 안내를 받는다. 지방 행정가라면 주목해야 할 교외형 교류 카페의 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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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보디가드는 넓고 밝은 공간을 마치 내 거실처럼 쓸 수 있도록 공간의 문턱을 낮춰주었다. 이 시대의 카페텍처는 좋은 공간에서 차를 마실 수 있도록 체험의 문턱을 낮추고, 쉽게 이웃을 만나도록 교류의 문턱을 낮추고, 건축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깨닫도록 이해의 문턱을 낮추고, 지역경제의 순환이 일어나도록 지역 활성화의 문턱을 낮추고 있다. 애초에 이런 의문이 든다. 유독 우리 사회에서 카페가 융성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 사회에 높은 수준의 공적 공간이 부족한 상황이 하나의 이유가 아닐까. 뉴욕 시민들처럼 멋진 보자르풍 공립 도서관에서 책을 읽을 수 없고, 파리 시민들처럼 조경가가 세밀하게 매만진 몽수리 공원을 산책할 기회가 우리에게는 없다. 그 빈틈을 북카페와 정원카페가 메워주고 있는 것이다. 때마침 카페를 여는 주인들은 수준 높은 공간을 만들려는 의지와 자본을 가지고 있다. 때마침 대중들은 수준 높은 공간을 경험하고 싶은 열망을 갖게 되었다. 대중 친화를 근본에 장착하고 있는 카페는 공적 공간에서 부족했던 경험을 낮은 문턱 너머로 사람들을 초대해서 나눠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카페텍처의 유형학을 통해 던지고 싶은 궁극적인 질문은 이런 것이다. 지금 새로운 카페를 설계한다면 나는 건축의 어떤 문턱을 낮추고 싶은가? 나만의 공간 미학을 과감하게 실험하면서도 소비 체험을 의미 있게 만드는 행동 설계를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다. 상업적인 볼거리를 만들면서도 지역경제의 순환을 만드는 시스템을 고안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글 조성익 / 진행 방유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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