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MSPACE는 국내 최고의 건축 포털 매거진입니다. 회원가입을 하시면 보다 편리하게 정보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Login 회원가입
Naver 로그인


의미, 기억, 유산을 수호하는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

김정은 편집장
진행
김지아 기자
background

​​​「SPACE(공간)」 2023년 11월호 (통권 672호) ​ 

 

데이비드 치퍼필드 ©Yoon Hyeonki 

 

2023년 프리츠커상 수상자인 데이비드 치퍼필드가 한국을 방문했다. 수상 기념으로 마련된 특별 전시 〈빌딩, 뷰티〉와 강연을 위해서였다. 지난 9월 26일 「SPACE(공간)」는 치퍼필드를 그가 설계한 아모레퍼시픽 본사에서 만나 프리츠커상 수상 소감을 비롯해 건축 철학, 한국에서의 경험 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프리츠커상의 의미

올해 3월, 52번째 프리츠커상 수상자로 데이비드 치퍼필드가 선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1979년 필립 존슨의 첫 번째 수상 이래, 프리츠커상의 수상자 선정 기준은 당시 사회와 건축계의 화두에 따라 변화해왔다. 사회주택 프로젝트로 유명한 칠레의 알레한드로 아라베나(2016년 수상), 첫 여성 공동수상자이자 아일랜드 출신 건축가인 이본 파렐과 셸리 맥나마라(2020년 수상), 생태적 리모델링으로 잘 알려진 안느 라카통과 장-필리페 바살(2021년 수상), 아프리카 출신의 프란시스 케레(2022년 수상) 등. 최근 수상자들의 면면을 보면, 지속가능성, 지역, 윤리, 소수자에 대한 관심 등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건축가들을 선정해왔다는 게 중론이다. (일본 건축가의 다수 수상은 또 다른 이야기이니 논외로 해두자.) 건축계의 ‘노벨상’이라는 수식어로 짐작해볼 수 있듯 프리츠커상 수상이라는 일련의 이벤트가 건축의 존재감을 건축계를 넘어 사회적으로 인식시킬 수 있는 기회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1985년 영국에서 자신의 사무실을 연 후 지금은 세계 곳곳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치퍼필드는 이미 100여 개의 건축상을 받았다. 지난 6월에는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마지막 작업인 베를린 신국립미술관을 복원한 프로젝트로 유럽 건축유산 개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경력 전체를 두고 “건축 예술을 통해 인류와 건조환경에 공헌”한 건축가에게 수여하는 이 상의 수상은 남다를 것이다. 또한 커진 대중적 영향력만큼이나 건축의 사회적, 문화적 가치를 전달해야 한다는 책무도 크게 다가올 것이다. 

 

“프리츠커상을 수상했다고 삶의 태도가 바뀐다거나 우선순위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한 일종의 확신이나 자신감을 주기도 해서 사무실의 다른 동료들이 굉장히 기뻐했다. 한편으로는 어떤 권위를 주기도 한다. 지속가능성이나 사회적인 책임감을 가지고 추진하는 프로젝트에서 우리가 좀 더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고 느낀다.” 

 

아모레퍼시픽 본사, 대한민국 서울(2017) / ​Image courtesy of Amorepacific

 

아모레퍼시픽 본사, 대한민국 서울(2017) / Image courtesy of Noshe 

 

건축적 태도의 출발 

1953년 런던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건축교육을 받고, 리처드 로저스와 노먼 포스터 등의 사무실에서 일했던 그가 자신의 이름으로 작업을 시작할 초창기에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영국에서는 아웃사이더였다. 그 무렵 그가 일본에서 이세이 미야케의 작은 숍 인테리어와 같은 일들을 하는 기회를 얻고 안도 다다오의 후원을 받기도 했다는 일화는 많이 언급된다. 치퍼필드는 다큐멘터리 ‘형태와 물질’(2012)에서 1980년대 중후반 4~5년간 일본에서 했던 작업이 일반적 미학적 기준이 없어서 (법규만 지킨다면) 훨씬 더 자유롭게 실험할 수 있었고 그것이 건축적 훈련이 되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이후 1993년 베를린의 신박물관(2009) 공모전 등에 참여하고, 영국에서 조정박물관(1997)을 짓게 되면서 공공건축물을 통해 다층적인 도시적 맥락에 대응하는 작업을 선보이기 시작한다. 치퍼필드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는 신박물관에서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기념비적 건축물에 새로운 해석을 덧붙이는 대신 보존을 기본 원칙으로 두고 현대적인 시설을 조심스럽게 추가한다. 기존의 맥락을 극도로 존중하는 접근은 향후 도시의 기억과 (건축) 유산을 복원하거나 확장하면서 도시의 연속성을 유지하려는 그의 건축적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프리츠커상을 수상하면서 치퍼필드는 “건축가로서, 나는 어떤 면에서는 의미, 기억, 유산의 수호자다. 도시는 역사적 기록이며, 건축은 특정 순간 이후 역사적인 기록이 된다. 도시는 역동적이므로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진화한다. 그리고 그 진화 속에서 우리는 건물을 없애고 다른 건물로 교체한다. 우리는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최고의 것만을 보존한다는 개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는 또한 도시 진화의 풍요로움을 반영하는 개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문제이기도 하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도시의 고유성을 지속하는 일은 비단 사회적으로 보존과 복원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프로젝트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건축을 대하는 태도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K-프로젝트, 대한민국 서울(2022~) / Image courtesy of David Chipperfield Architects, Samoo Architects and Engineers 

 

문화적 다양성과 도시적 맥락

엄격한 구성, 반복적인 그리드와 기둥, 고전미와 공존하는 현대성, 합리성 등은 치퍼필드 건축을 묘사하는 말들이다. 새로움이나 낯선 형태에 의존하지 않는 이 건축가는 건축에 자신의 인장을 새겨넣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프리츠커상 선정 발표문에 따르면, “우리는 다른 도시에서 즉각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데이비드 치퍼필드의 건물을 볼 수는 없지만 각 상황에 맞게 특별히 설계된 다양한 치퍼필드의 건물은 볼 수 있다. 그의 건물이 이웃과 새로운 연결을 생성하는 동안에도 각각은 그 존재감을 주장한다.”

영국에서조차 이방인이라는 감각을 유지하는 치퍼필드는 자신만의 조형이나 재료를 반복하기보다 장소와 프로그램에 반응한다. 파리 퐁피두센터와 문화 파트너십 관계를 맺고 있는 중국 상하이의 웨스트 번드 미술관(2019)은 건축적 스펙터클보다는 장소만들기와 시민 가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평을 받는다. (프랭크 게리의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을 떠올려보자.) 베를린 박물관 섬의 새로운 관문 역할을 하는 제임스 사이먼 갤러리(2018)는 계단, 가느다란 열주, 중정 등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자연스럽게 연결하면서 시민들을 초대한다. 기후가 온화한 멕시코시티의 후멕스 박물관(2013)은 파빌리온 형태의 구조와 광장을 통해 안과 밖이 이음매 없이 연결되며 시민들의 공간으로 거듭난다. 

 

데이비드 치퍼필드 ©Yoon Hyeonki

 

한국에서의 작업

이렇게 다양한 도시에서 작업한 그에게 한국에서의 경험은 어떠했을까?

 

“아모레퍼시픽 본사를 설계할 때 크게 두 가지를 고려했다. 하나는 한국 전반의 문화적 맥락. 그리고 다른 하나는 클라이언트가 이 프로젝트와 프로그램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에 대한 이해였다. 모든 작업을 할 때 이 두 가지에 관심을 둔다. 나에게 모든 프로젝트는 단순히 커리어를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라기보다는 사회적·문화적 교류를 할 수 있는, 다른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기회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건물을 지을 때 그 장소가 아니면 상상할 수 없는 건물을 지으려고 한다. 후멕스 박물관은 멕시코에만 어울리는, 제임스 사이먼 갤러리는 독일에 어울리는 건물이다. 이런 건물을 지으려면 어디서 영감을 받고 어떤 정보를 가지고 지을 것인지 고민해봐야 한다. 그랬을 때 시각적인 단서나 문화적인 클리셰에서 영감을 받을 수는 없다. 멕시코처럼 생긴 건물, 한국처럼 생긴 건물을 지을 수는 없는 것이다. 역사적인 모티프를 그대로 차용할 수도 없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인접한 환경뿐만 아니라 좀 더 상위의 문화적 맥락까지 깊게 고민하며 영감의 원천을 찾는 것이다.”    

 

“아모레퍼시픽 본사의 기본적인 열망은 아름다움이나 명확성, 조화였다. 그래서 설계에서부터 구조, 마감재, 시스템 

이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게 통합되어 있는 건물이다. 만약 질서에 맞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면 콘셉트의 균형이 깨져서 지금 이 공간에서 느낄 수 있는 어떤 편안함이나 고요함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실로 엄청난 프로젝트였다. 천장, 파티션, 조명, 그래픽 등 모든 요소가 모두 프로토타이핑되고 테스트되어 맞춰진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한 요소도 의도적으로 고려되지 않은 것이 없다. 이러한 엄격함 때문에 시공이 무척 어렵다. 그런데 아모레퍼시픽의 회장 서경배는 통상적인 시공 방식이 우리 설계에 맞지 않을 때 우리가 제기하는 의문을 수용하고, 해결하려는 노력을 지원했다. 클라이언트가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경우는 심지어 유럽에서도 드문 일이다. 그렇게 우리는 클라이언트와 함께 아모레퍼시픽 본사를 건설의 기준을 높이고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로 삼게 되었다.” 

 

올해 3월, 치퍼필드가 성수동에 설계한 IT 회사의 오피스 빌딩 K-프로젝트의 조감도가 공개됐다. 아모레퍼시픽 본사를 비롯한 치퍼필드 건축에서 보이는 엄격함이 다소 중화되고 원형 저층부와 사각형 상층부의 대비, 원형 코어의 강조 등으로 좀 더 역동적인 인상을 풍긴다. 

 

“K-프로젝트의 경우에도 맥락과 프로그램 자체를 생각했다. 이 건물은 클라이언트가 에너지나 유기적인 면을 강조하는 프로그램을 요구했다. 한편 아모레퍼시픽 본사는 우리가 설계부터 시공까지 직접적으로 개입했다면, K-프로젝트는 콘셉트 디자인까지만 했다. 시공까지 직접 관여할 수 없기 때문에 콘셉트 디자인이 의도대로 구현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시공 단계에서 어떤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예상하고 설계를 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지켜야 하는 선을 정해준다. K-프로젝트의 경우는 이렇게 덜 통합되고 덜 조율된 느낌이 프로그램이나 클라이언트의 성격에도 어울리는 현실적인 해법이라고 생각한다.”

 

신박물관, 독일 베를린(2009) / Image courtesy of Ute Zscharnt for David Chipperfield Architects 

 

신박물관, 독일 베를린(2009) / Image courtesy of SPK, David Chipperfield Architects ©Joerg von Bruchhausen 

 

기후위기 시대의 건축

치퍼필드는 2017년 오랫동안 인연을 맺었던 지역인 스페인 갈리시아에서  비영리 단체인 리아 재단(Fundación RIA)을 설립하고, 건축과 자연환경 간의 관계를 회복하고 삶의 질에 기여하는 요소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있다. 이곳에서 그는 건축가이자 계획가로서 다양한 스케일과 차원으로 장소에 개입하고 있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기후위기에 직면한 오늘날 건축(가)의 과제에 대한 생각을 청했다. 

 

“기후위기는 지금까지 우리가 해왔던 방식으로 계속해서 건설할 수는 없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지금의 건설 산업은 탄소배출이나 자원의 사용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다른 산업 분야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전문가로서 이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우리의 작업 기준을 수정하고, 지금까지 해왔던 건축/건설 방식을 바꿔야만 한다. 기획, 설계, 시공, 개발 등으로 구분하는 게 아니라 통합적이고 순환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필요하다. 지난 30~40여 년 동안 건축가들은 각각의 개별 건물을 지어왔다. 건물의 이미지를 통해 정체성을 만들거나 멋진 혁신만을 꿈꾸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 자체도 그만큼 중요해진다. 건축물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실제적으로 고려하면서 자원을 중시하는 마인드로 매 단계에 접근하게 되면 많은 의사결정이 영향을 받게 된다. 그렇게 되면 구조, 형태, 자재 이 모든 것들이 달라지게 될 것이다. 이제 막 그런 노력들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그래서 10년 후가 되면 건축물의 모습이나 우리의 일하는 방식은 많이 바뀌어 있을 것이다.”​ (글 김정은 편집장 / 진행 김지아 기자)

 

후멕스 박물관, 멕시코 멕시코시티(2013) / Image courtesy of Simon Menges 

 

몰랑드 믹시테 카피탈, 프랑스 파리(2022) / Image courtesy of Simon Menges 

 

제임스 사이먼 갤러리, 독일 베를린(2018) / Image courtesy of Simon Menges 

월간 「SPACE(공간)」 672호(2023년 11월호) 지면에서 더 많은 자료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SPACE, 스페이스, 공간
ⓒ VMSPAC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데이비드 치퍼필드
데이비드 치퍼필드는 킹스턴 예술대학교와 런던의 AA 스쿨에서 공부했다. 그는 더글러스 스테판, 리처드 로저스와 노먼 포스터의 사무실에서 일했으며, 1985년 자신의 사무소를 세운 후 현재는 런던, 베를린, 밀라노, 상하이, 그리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지사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2009년 독일연방공화국 공로훈장을, 2010년 영국과 독일 건축에 대한 공로로 기사 작위를 받았다. 2011년에는 건축 부문 RIBA 왕립 금메달을 받았으며, 2021년 건축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명예훈장 회원으로 임명됐고, 2023년 프리츠커 건축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데이비드 치퍼필드는 2012 베니스비엔날레 총감독으로 임명되어 ‘공동의 기반’이라는 주제로 전시를 기획했다. 2017년 그는 민간 비영리 단체인 리아 재단을 설립하고 스페인 갈리시아에서 경제, 환경 문화적 개발을 위해 일하고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