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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땅과 물, 이야기를 잃지 않으려면: 백운동천 물길공원 계획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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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서구건축사사무소
자료제공
허서구건축사사무소
진행
윤예림 기자

「SPACE(공간)」 2024년 5월호 (통권 678호) 

 

서울 한복판, 경복궁을 뒤로하고 조금만 길을 오르면 창의문 기슭에서 흘러내려오는 백운동천과 대한제국 시절의 독립운동가 집터가 있다. 비록 물길은 도로 밑에 묻혔고 집은 그 터만 남아 지금은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이곳 생태와 역사를 복원하는 일이 서울의 정체성을 되찾는 일이라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지난 2월, 「SPACE(공간)」 편집부에 걸려온 한 통의 전화에 허서구(허서구건축사사무소 대표)를 만났다. 그의 말에 따르면 백운동천 일대는 현재 민간업자에게 매입·개발될 위기에 있다. 이대로라면 우리 땅의 이야기를 영영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것이 그가 발로 뛰는 이유다. 허서구가 지켜 알리려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그리고 더 풀어야 할 숙제는 무엇인지 들어본다. 

 

백운동천 상류에는 1903년 김가진이 ‘백운동천(白雲洞天)’이라 새긴 각자바위가 남아 있다. 

 

김가진이 1919년 상하이로 망명하기 전까지 지내며 활동했던 백운장 터의 모습 

 

윤예림(윤): 백운동천 물길공원 계획안은 서울시 종로구의 백운동천 물길과 백운장 터 일대를 공공 공원으로 조성하자는 뜻을 담은 계획안이다. 백운동천은 청계천의 발원지이자 가장 긴 지류로 알려져 있지만 현재는 상류 일부를 제외하고 완전히 복개돼 존재감을 느끼기 쉽지 않다. 이곳에 주목하게 된 이유가 있나?

허서구(허): 이 땅이 간직한 역사를 알게 되면서 시작됐다. 백운동천과 백운장 터 일대에는 조선 후기 경화사족의 흔적과 4대에 걸친 독립운동 가족사가 얽혀 있다. 백운장은 대한제국 시절 법무대신이었던 김가진(1846~1922)이 비원장의 직책으로 비원 중수를 완수하고 남은 자재와 땅을 고종으로부터 하사받아 일군 집이라 알려진다. 창덕궁의 애련정과 관람정의 주련들이 김가진의 글이다. 김가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망명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수많은 활동을 했다. 그가 1903년 ‘백운동천(白雲洞天)’이라 직접 새겨 넣었다는 커다란 각자바위 또한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백운장의 소유권이 동양척식주식회사로 넘어갔다. 반환소송이 추진됐지만 1919년 김가진이 상하이로 망명한 뒤 1922년 사망하면서 소송은 중지된다. 광복 후 김가진의 후손들이 적산이 된 백운장을 불하받으려 갖가지 노력을 했으나 1950년 아들 김의한이 납북되어 또다시 중지됐고 5·16 군사정변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이하 후기성도교회)에 매각됐다. 이후 후기성도교회는 해당 부지의 매각과 개발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상태다. 후손들은 오랫동안 이 땅의 의미를 되찾으려는 시도를 해왔다더라. 그러던 중 내게 자문을 구하러 찾아오면서 지금의 여정이 시작됐다.

 

윤: 개인의 역사나 이권의 영역일 수 있는 이야기를 공공의 이야기로 확장한 셈이다. 

허: 역사적 서사를 시작으로 이 지역 일대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실타래처럼 연결된 이야기를 하나씩 하나씩 발견할 수 있었다. 백운동은 인왕동, 삼청동 등과 함께 조선시대 한양의 5대 경승지 중 하나였다. 백운동은 흰 구름이 떠 있는 계곡이라는 의미인데, 백운동의 ‘동(洞)’은 오늘날의 행정구역을 뜻하는 ‘동’이 아니라 골짜기, 즉 계곡이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창의문 기슭에서 발원해 한양도성의 주산인 북악산과 인왕산 사이로 능선과 계곡을 형성하는 백운동천의 경관은 시대를 관류하며 기록으로 남겨졌다. 강희맹을 비롯한 조선 사대부들이 읊조린 시어, 조선 후기 겸재 정선이 그린 실경산수화 등에서 창의문과 백운동의 구체적인 풍경을 찾아볼 수 있다.

학술적인 면에서도 의미 있는 기록물이 많다. 조선총독부에서 제작한 그 시대의 지형도, 1954년 보수공사를 위한 백운장의 실측도면과 계획도면, 반환소송 과정에서 작성된 해방 직후의 수기도면, 귀속재산 매각소청을 위한 측량도면, 각종 사진과 신문기사 등 현존하는 여러 기록물에서 이 땅과 공간이 근대화 과정을 통해 변모해간 연대기를 추적할 수 있다. 역사, 문화, 학술적으로 이처럼 다양한 자료가 축적된 문화자원도 드물지 않나. 

백운장 일대의 지적 현황을 살펴보면 1912년 최초의 근대적 측량이 이루어진 이후 현재까지 비교적 큰 변화가 없다. 개발이 제한된 보전녹지지역이 다수 포함돼 있고 종교시설이 입지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한 달에 자동차 백만 대가 오가는 도로가 됐지만 여전히 그 아래로 바위들이 연결되고, 물길이 흐르고 있다. 윤동주문학관 앞 도로에서 맨홀에 귀를 기울여 봐라. 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웃음) 

깊숙한 이야기를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건축가로서 이곳 지역이 가진 잠재력과 가능성을 탐지할 수 있었다. 그러자 사적 접근이 아닌 공적 접근이 필요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물길 회복을 통한 역사, 생태, 환경의 복원이 절실하다. 땅이 매각되고 개발된다면 더는 꿈꿀 수 없는 일이다. 공공의 문을 두드려보자고 후손들과 의견을 같이했다.

 

(왼쪽) 인왕산과 북악산 일대의 명소 여덟 곳을 담은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 중 백운동 풍경을 묘사한 ‘백운동’(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오른쪽) 1925년경 경성 동양인쇄주식회사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백운장 사진 엽서 ​

 

윤: 공공을 위한 계획이지만 공공기관의 발주가 아닌 개인의 목소리로부터 출발해 올라가고 있다는 점이 인상 깊다. 어떻게 의견을 개진해가고 있나?

허: 공적인 영역으로 간주될 수 있는 백운동천 일대의 이야기를 더 촘촘하게 엮어나가기 시작했다. 단순히 건축과 토목의 영역에서의 가치뿐 아니라 인문・환경적 가능성을 함께 이야기하고자 했다. 사실 청계천 원류로서 백운동천의 복원은 2013년 서울시가 발표한 ‘청계천 2050 마스터플랜 계획’을 비롯한 여러 계획에서 한참 전부터 있어 왔던 주제다. 하지만 그 중요성에 대해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지 않다 보니 실제적인 계획과 실천은 지지부진했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가능성과 잠재력을 알리고 공감대를 넓히는 것이 우선이었다. 말로만 하는 주장이 아니라, 사람들이 직접 상상하며 그 가치를 느낄 수 있도록 그림을 그려 보이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느꼈다. 그래서 내 나름의 계획안을 구상하고 그리기 시작했다.

 

윤: 백운동천 물길공원 계획안의 주된 콘셉트는 바위를 드러내고 물길을 이어주는 것이다. 건축가로서 대지에서 발견한 잠재력이 무엇이었는지 듣고 싶다.

허: 백운동천 상류 지역은 비오톱 1등급 생태보전지역으로, 오랜 시간 인공의 개입이 최소화되어 훌륭한 생태환경을 간직하고 있다. 또한 지금은 부엽토와 낙엽층으로 가려 있지만 이를 걷어내면 서울이 원래 가진 지형과 물길이 드러난다. 이러한 서울의 고유한 지형과 물길이 곧 서울의 정체성이고 이야기다. 서울을 감싸는 북한산, 도봉산, 북악산, 인왕산은 하나로 연결된 화강암 덩어리와 같다. 이렇게 산에 둘러싸인 도시가 더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 도심에서 시민들이 이를 실제로 경험하고 체험할 기회가 많지 않은 것 같다. 교토나 런던 등의 도시를 보면 30~50cm 폭의 작은 물길이 사람들이 걷고 놀고 일하는 일상의 거리에 자연스레 공존한다. 서울 역시 백운동천의 끊어진 상류와 하류를 이어주고, 자하문터널로 훼손된 바위산의 본모습을 되찾아주고, 주변 일대를 공원화한다면 산과 물이 공존하는 도시로 환경적 가치를 배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현재 인왕산으로 들어가는 이렇다 할 입구가 없다는 점에도 주목했다. 백운동천 물길공원 계획안이 실현된다면 인왕산의 진입 마당으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대지의 북측에 인접한 청운문학도서관과도 지리적, 프로그램적으로 연계가 가능하다고 본다.

 

윤: 백운동천 물길공원 계획안은 ‘물집’ 다섯 개와 ‘책집’ 세 개로 구성된다. 어떤 공원을 상상하고 그렸나?

허: 바쁜 도시의 가장 근접한 곳에서 숲으로의 초대가 이루어지는 도심 속 쉼터이자 책 읽는 공원을 상상했다. 기존의 물길과 지형 그리고 집터를 따라 물집과 책집이 ‘걸음길’을 형성한다. 도성 안을 내려보고 북악을 올려보는 자하문 망악루, 공원을 배경으로 쉬어가는 휴게실, 햇살과 바람이 드는 도서관과 전시실 등이 배치된다. 각 공간은 건물이기보다 수공간을 품은 파빌리온에 가깝다. 대지 최상부의 발원지부터 김가진의 흔적이 묻어 있는 몽룡정과 각자바위, 백운장, 그리고 저류지, 벽천지 등의 수공간이 백운동천의 물길을 재현한다. 백운장 터에는 고증을 거쳐 구조를 복원하고 공간을 재현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백운장에 대한 다양한 자료와 사료를 수집, 분석, 전시하는 공간으로 사용해도 좋을 것이다. 이때 건물의 골조는 한옥의 형태를 따르되 외피를 투명하게 계획해 숲속의 나무들이 그 자체로 지붕이 되고, 목구조의 아름다움을 밖으로 드러내는 모습을 상상했다. 

이렇듯 구체적인 상상을 유도하기 위해 물집과 책집을 주제로 이야기를 구성했다. 그러나 내가 그린 그림의 역할은 그저 하나의 가능한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지, 이대로 설계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번 계획안에 담긴 이야기가 또 다른 이야기를 연쇄적으로 끌어내길 기대한다는 것이다. 백운동천 물길공원이 제안하는 가치와 방향에 대해 함께 생각하고 미래를 도모할 수 있는 지지자가 많아지길 바란다.

 

백운장 배치도(김가진 후손 소장) 

 

백운동천 물길공원 계획안 배치도 

 

윤: 공공기관을 비롯한 주변의 반응은 어떤가? 현재 프로젝트가 어떤 상황에 있는지 궁금하다.

허: 후손들과 함께 찾아갈 수 있는 곳은 모두 찾아가고 두드려 보고 있다. 서울시 총괄건축가를 만나고, 언론과도 접촉하고, 국회의원 선거사무소도 찾아갔다. 어떻게든 이 일을 공적인 영역으로 확대시킬 힘을 얻고자 했다. 이전에 문화비축기지(2017) 프로젝트를 함께 했던 서울시 푸른도시여가국에서도 신문기사를 보고선 연락을 해왔다. 덕분에 예산 등 현실적으로 프로젝트에 걸림돌이 되는 요소들을 함께 살펴본 뒤 시의 관련 부서에 건의해볼 수도 있었다. 한번은 계획안을 가지고 서울시장 오세훈과 국장들이 배석한 가운데 발표와 면담을 하기도 했다. 그다음으로는 종로구청장과도 논의를 했다. 모두 긍정적인 반응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예산과 직결된 시안이다 보니 여러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힌다. 하지만 처음부터 한번에 끝날 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한 걸음씩 공감대를 형성하고 분위기를 만들어가려 하고 있다. 

후기성도교회와도 계속해서 접촉을 시도 중이다. 부지가 부동산업자에게 매각된다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불가역적 개발이 진행될 것이 분명하기에, 그것만큼은 막자는 것이 지금으로서 가장 시급한 과업이다.

 

윤: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있나?

허: 이야기를 공론화하고 널리 알리는 것이다. 종교 법인이 땅을 매각할 때 최종적으로 시의 승인이 필요하다. 서울시도 이 사안에 대해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들려오는 이야기로는 후기성도교회가 미국 대사관과 접촉하는 등 그들의 민원 해결을 위한 나름대로의 시도를 하고 있다고 한다. 상황에 따라 미국의 후기성도교회를 한 번쯤 방문할 생각도 하고 있다. 우선 이 땅의 역사적, 환경적 가치를 설명하면서 더 이야기를 나눠보면 어떻겠냐는 편지를 보내놓은 상황이다. 

이외에도 프로젝트를 여러 분야로 확장하고 공론화하려는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대학 건축학과 스튜디오에서 이 주제를 놓고 프로젝트를 진행한다거나, 모금운동 등의 시민운동을 생각해보기도 했다. 건축계 내에서는 세미나와 포럼을 준비해보려고 한다. 건축가들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줄지 걱정되는 마음도 있다. 지역적으로 백운동천과 가까이 활동하고 있는 분들부터 찾아가 연대해보고자 한다.

 

윤: 현재로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상황을 알고 공감하는 것이 우선인 듯하다. 더 큰 도약을 위한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말해 달라.

허: 건축계를 비롯한 사회 전반의 관심이 더 모아진다면 무차별적인 개발을 막고 계획안을 실현하는 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지금까지 의미 있는 걸음을 했고, 이제 또 재정비를 해 계속 앞으로 나아가려 한다. 개인적인 고백을 하자면 프로젝트의 종점으로는 문학, 그중에서도 소설을 계획하고 있다. 이야기의 배경이 과거일지 현재일지, 내레이터가 나일지 다른 누군가일지, 어떤 형식의 소설이 될지는 아직 모르겠다. 프로젝트의 완성, 그 끝은 문학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것에 대해 다듬어진 이야기가 있다면 그 자체로 문화자산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백운동천과 백운장 터를 중심으로 하나의 문화자산이 형성된다면, 이를 시작으로 더 많은 이야기들이 생성되고 보다 많은 사람들과 발전적인 내일을 논의할 수 있지 않을까.​ 

 

백운동천 물길공원 계획안 중 백운장 투시도 

 

백운동천 물길공원 계획안 중 자하문 망악루 투시도

월간 「SPACE(공간)」 678호(2024년 05월호) 지면에서 더 많은 자료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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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서구
허서구는 한양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베를라헤 인스티튜트에서 수학했다. 한양대학교 건축학부 교수를 역임했고 허서구건축사사무소_許家房(허가방)의 대표로 재직 중이다. 7년간 양평에서의 작업이 있었으며, 대표작으로 국립현대미술관 청주, 문화비축기지 등이 있다. 한국건축가협회상, 한국건축문화대상, 서울특별시 건축상 대상 등을 받았다.

  • 2025년 07월 13일
    강력하게 지지합니다.
    1년이 지났는데 지금 이 프로젝트 어찌 되고있는지요...
  • 2025년 07월 13일
    강력하게 지지합니다
    오늘 스레드에 이 기사 퍼올렸어요.
    1년이상 지났는데 지금 어떻게 되고있는지 궁금합니다.

    정권도 바뀌고 청와대도 돌아오고...
    서울시장은 그대로지만 문체부장관도 바뀌잖아요.
    이 프로젝트 다시 추진해봐요
  • 2024년 06월 27일
    백운동천 물길 공원 응원하고 응원합니다.

    서울은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고 실재하는 멋과 맛과 얼이 있는 도시입니다.
    한데 무관심하고 무지하니 보이는 것도 아는 것도 없어서, 우리 손으로 파묻고 파내고 없애니
    그 속도와 규모가 가히 일제강점기에 일부러 없앤 것을 능가합니다.
    늘 안타까운 마음이었는데 좋은 뜻이 잘 펼쳐지고 세워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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