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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순하고 잉여로운 어떤 필요: 기둥 옷 | 건축사사무소 플로라앤파우나

글
이다미
사진
임효진
자료제공
건축사사무소 플로라앤파우나
진행
박지윤 기자

「SPACE(공간)」 2025년 2월호 (통권 687호) 

 

 

 

중학교의 오래된 탁구실을 재정비하는 작업이다. 선생님들이 스쳐가는 공립학교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남지 않았지만 과거 축구부가 합숙소로 쓰던 공간이라고. 남은 사람들의 기억도 흐릿해진 언젠가부터 탁구실이 자리 잡게 되었다고 했다. 그 공간 그대로. 빛바랜 벽지가 발리고 반쯤 뜯긴 장판이 깔린 방에 낡아 뒤틀린 가정용 가구들이 수줍게 자리했다. 탁구대들은 혼란 속에서 제법 당당하고 현명하게 자리 잡아 학생들을 반기고 있었다. 닫힌 문을 열면 하얀 타일의 광활한 샤워실 한 켠에 청소노동자의 휴식용 침대가 소소한 살림과 함께 공간의 냉기를 누르고 있었다. 

건물의 낡은 흔적을 털고 위생적으로 시원하게 열어 새 마감재로 정리하기. 모더니스트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닐 텐데 나는 중요한 질문에 못미더운 답변을 쥔 기분을 느끼며 바쁜 교장선생님과 학기마다 새로 나타나는 행정실장님들을 피해 거의 반년에 걸쳐 디자인을 계속 수정했다. 돌이켜보면 작업에서 가장 의미심장했던 순간은 당구대도 넣고 작지만 샤워탈의실도 갖추고 교사대기실도 만들고 이것저것 복합 기능을 섞어보려던 학교가 장고 끝에 탁구실을 그냥 탁구실로 두기로 하며, 탁구실이 탁구실이 되기로 한 결정이었다. 탁구대 사이 적당한 간격을 빼면 세상에서 제일 필요한 게 없어 보이는 탁구실이 되기로!

물론 새로운 필요가 반영된 곳도 있다. 운동장을 향하여 새로운 출입구도 내었고 청소노동자 휴식 공간도 제대로 만들었다. 늘어난 면적을 활용해 의자와 마루로 앉을 자리를 충분히 마련하여 급식소 옆 학생들의 쉼의 공간으로 탁구실 성격을 확장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우연히 농밀했던 탁구실을 섭섭지 않게 대체했다고 보긴 힘들었다. 비록 낡고 어둡고 침침하고 앉아 쉴 곳이 부족하긴 했지만 고치기 전에도 이곳은 적당히 흥미로운 탁구실이었다. 누군가의 의도는 아니지만 필요에 빗겨간 배경의 언캐니함은 건물을 스스로 살아있게 했고 후미진 구석은 학교의 비밀 이야기나 사춘기의 웃음과 음울이 자주 불려 나올 것 같았다. 그렇다 이것은 기능의 문제는 아니다. 하필 필요한 게 없다니 더욱 느껴지는 어떤 필요, 건축이 우리와 심상으로 연결되는 순간에 관한 문제였다. 생각이 한 바퀴 돌고 나서야 건축가로서 내가 가장 흥미로워하는 문제에 답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장식과 이미지의 가능성 말이다. 

 

 

 

문제가 명확해지자 답은 다시 멀어졌다. 손에 닿는 모든 것이 멀끔해지고 마는 거친 관급 공사의 생리와 단출한 예산, 있던 벽마저도 털어내고 비워질 탁구실의 숙명 앞에 새 장소가 이전처럼 학생들과 학창 시절의 이상한 심상 속에 밀도 높게 얽혀 있기를 포기하지 않는 방법은 무엇이란 말인지. 건축가가 어렵게 이유를 찾는 동안 공청회에서 만난 사람들은 직관적으로 이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화사함이나 원색의 사용과 같은 요청이 많았지만 다른 공간들 특히 초등학교 때부터 충분히 경험해온 공간이니 중학생이 되어선 다른 것들을 경험할 수 있게 하자고 물렀다. 대신 움직임과 놀이와 쉼, 몸을 돌보는 장소인 만큼 부피와 곡면, 무게의 감각과 연결 지어 보자며 공감과 반향 사이에서 개념이 먼저 던져졌다. 

고민은 기둥을 더듬어가며 풀리기 시작했다. 모두 열린 실내에도 피할 수 없이 남겨져 새로운 마감 옷이 필요한 것들이기도 했고 학교라는 제도 공간이 품어온 무미하고 중성적인 반복의 구조를 품고 있는 요소이기도 하니까. 개별 기둥들에 춤추듯 흔들리는 새 옷을 입혔다. 어떤 것들은 옆으로 흐드러지며 벽에 가까워지고 어떤 것들은 배를 불려 초대하기보다 밀어내는 순간을 만들어냈다. 벽에 붙어 부피가 도통 필요하지 않는 것들에도 과장된 부피를, 기둥이 없던 자리에도 기둥 옷만을 씌워 진짜와 가짜, 순수함과 가능성 사이에 농담의 여지를 함께 마련했다. 그러면서 다름과 잉여가 가진 즐거움과 풍요로움이 기둥의 사방으로 공간의 구석들에 느슨한 캐릭터를 함께 만들어주기를 기대했다. 이곳에서 기둥은 가장 순수했던 것에서 가장 불순한 가능성이 되었다. 과장되고 차이를 가지며 무언가가 된다. 학생들을 닮지 않으면서도 무언가가 되어가는 학생들을 닮는다. 전체에 앞선 부분이 된다. 기둥 옷의 볼륨, 네트 철망의 낯선 부피감, 날렵하게 생긴 금속 가구의 무게감이 주는 공간적 경험이 운동 자체의 경험과 더불어 학생들에게 잉여 활동에서 오는 감각을 환기시킨다. 이곳에 가장 필요한 감각이다.  ​ 

 

 

 

 

초읽기작 건축가 연보

 

이다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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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 10. 밀양 출생, 밀양강 둔치와 부산 구도심을 오가며 어린 시절 보냄

1990년대 중후반 부산에서 사춘기를 보내며 깡통시장에서 일본 패션잡지를 통해 스트리트 패션을 접함, 「쎄씨」, 「키키」, 「신디 더 퍼키」와 같은 한국 패션잡지 키즈, 코스프레러와 어울려 다님

1990년대 후반 중학교 연극부 활동. PC통신으로 흑인음악 소모임이나 MIDI동호회 등을 돌아다니며 작곡가를 꿈꾸다 Y2K를 맞음. 부산국제영화제 출범

2004.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에 진학하며 서울살이 시작, 서울말 쓰는 사람이 되기로 함

2000년대 중반 이민아 스튜디오를 듣지도 않으면서 이민아에게 싸이월드 쪽지를 자주 보냄, 이민아의 추천으로 수전 손택과 존 버거 등의 책을 접함

2004. ~ 2005. 신디 셔먼의 사진 작업, 황병하 번역본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단편들을 읽기 시작

2006. 고 박철수의 주거론 수업: 문학으로 도시와 건축 읽기의 재미를 알게 됨

2011. ~ 2013. 하버드대학교 디자인대학원(GSD)에 진학하며 케임브리지 살이 시작. 린디 로이와 샌포드 크윈터, 파시드 무사비, 크리스티안 케레즈, OOO, 신유물론, 생태철학, 정동, 장식의 문제 접함

2011. ~ 2015. 케임브리지 외에도 도쿄, 뉴욕, 오클랜드에서 살거나 지냄

2013. ~ 2014. 리나 보 바르디의 작업을 처음 접함

2015. 한국 귀국 및 사회생활 시작. 페미니즘 리부트. 『원정수 지순 구술집』 읽음

2016. 서울공예박물관 공모안 제출하며 플로라앤파우나 이름 첫 사용

2018. 플로라앤파우나 공식 개소. 친구와 동료를 모아 기획집단 ‘여집합’ 구성, 『빌딩롤모델즈: 여성이 말하는 건축』 행사와 단행본을 기획 및 출간

2020. 사변적인 어린이 전시 <식물 동물 건물: 건축의 몸 상상 실험실> 작업

2020. ~ 2021. 구로중학교 탁구실 ‘기둥 옷’ 디자인

2021. 416생명안전공원 공모작 ‘오랫동안 기억하기’와 국립여성사박물관 공모작 ‘노이즈’ 출품

2020. ~2022. 팬데믹 시기 건축사 시험 준비하며 공연예술을 더욱 사랑하게 됨.

도나 해러웨이, 로지 브라이도티 등 페미니즘 퀴어이론 등을 읽음, 캐시 박홍의 『마이너 필링스』, 레거시 러셀 『글리치 페미니즘 선언』,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G.H.에 따른 수난』, 『달걀과 닭』 등 자기 안으로 들어가서 자기 바깥으로 나가는 이야기들과 영화 ‘티탄’,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봄

2023.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젊은 모색 2023: 미술관을 위한 주석>에 ‘드랙 뮤지엄’으로 참여. 김태수 아카이브 자료에 접근

2022. ~ 2024. 군산시민문화회관 아카이브 작업, 김중업 아카이브 자료에 접근

2024. 건축사사무소 플로라앤파우나로 전환, 아직 큰 변화는 못 느낌

2024. 팀 잉골드와 티모시 모턴의 책들 그리고 매기 넬슨 『아르고호의 선원들』 읽음

2025. 2025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에 작가로 참여 준비 중. 프랑코 만쿠조 아카이브와 김석철 자료에 접근. 차학경의 『딕테』 읽는 중 

월간 「SPACE(공간)」 687호(2025년 02월호) 지면에서 더 많은 자료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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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미
이다미는 건축사사무소 플로라앤파우나의 대표다. 식물, 동물, 사물, 건물을 통해 공간과 관계의 생기를 작동시키는 물질의 존재 방식과 건축 이미지의 가능성을 사변한다. 다양한 크기와 재료, 시점, 역할을 통해 최소와 잉여의 가능성을 더듬는다. 이를 통해 산업화, 제도화된 건축의 풍경을 새로운 자연과 젠더, 장식의 측면에서 재고한다. 사회적 생물학적 개인적 다양성과 차이에 조응하는 번역자이자, 환원적 재생산에 간섭하고 교란시키는 개인으로서의 건축가의 중간적 위치의 (불)가능성에 주목하며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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