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공간)」 2025년 6월호 (통권 691호)
오랜 문명과 치열한 역사가 명멸된 인류의 본향, 아나톨리아 반도
튀르키예는 나라 전체가 하나의 박물관이다. 지리적, 역사적, 종교 문화적으로 동서양 문명이 교차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오늘날 인류가 ‘문명’이라고 자부하는 신화와 기술을 동시에 발아시킨 진정한 산실이기 때문이다. 인구 2천만 명이 거주하는 도시 이스탄불만 해도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출발해 오리엔트, 그리스, 로마, 비잔틴, 이슬람에 이르기까지 5,000년 역사 속에 감춰놓은 인류의 온갖 사연과 지혜, 그리고 창의적 실험 정신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역사학자 아널드 조지프 토인비의 “살아 있는 인류 문명의 옥외 박물관”이란 표현은 결코 과하지 않다.
튀르키예 영토는 해가 뜨는 곳이란 의미의 ‘아나톨리아’ 반도로 불린다. 이곳은 실제로 수많은 고대 문명과 신화, 구약성서의 배경이자, 트로이-아마존-히타이트-프리기아-리디아-리키아-페르시아 제국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주무대였다.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일리아드’, ‘오디세이아’를 비롯해 ‘이솝우화’가 여기에서 탄생했고, 노아의 방주와 에덴동산, 아브라함과 사도 바울의 고장인 하란, 성모 마리아의 유택과 초대 7대 교회 등이 아나톨리아를 배경으로 한다. ‘인류 문명의 요람’으로서 아나톨리아 반도의 중요성은 2014년 괴베클리 테페 유적에서 1만 2,000년 전 신전 도시 20여 곳이 발굴되며 한층 구체성을 얻게 되었다. 초고대 문명 유적지의 잇따른 발굴 성과는 인류 문명의 시원을 7,000년 이상 앞당긴 획기적인 대사건이었다. 그러나 이런 문명 창출의 주인공들은 오늘날 튀르크인들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그들은 공식적으로 1071년 이후 아나톨리아 반도에 새로운 주인으로 터를 잡았기 때문이다.
아나톨리아의 새로운 주인
튀르크인들은 기원전 2,000년경부터 광활한 유라시아 초원을 무대로 16개 제국과 100개가 넘는 소국가를 건설하여, 철과 말을 기본으로 한 수준 높은 스텝 문화를 이룩했다. 발전된 유목 문화를 바탕으로 그들이 세운 중앙아시아 제국이 흉노, 돌궐, 위구르 제국이다. 9세기 위구르의 멸망 이후 중앙아시아를 떠나 서쪽으로 진출한 튀르크인들은 11세기부터 동로마 제국의 영역으로 물밀듯 진출했다. 1071년 만지게르트 전투에서 동로마 제국의 황제 로마누스 4세를 생포하면서 셀주크 제국은 대승을 거두었고, 이후 아나톨리아 영토 대부분은 튀르크인들의 차지가 되었다. 이는 기독교 세력에 대한 이슬람의 승리를 의미했고, 셀주크 제국이 파죽지세로 동부 지중해와 예루살렘까지 점령하자 이에 맞서기 위해 로마 교황청이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는 명분이 되기도 했다. 셀주크 제국이 칭기스칸의 몽골 세력에 의해 멸망당하고 잠시의 혼란기를 거친 뒤, 1299년 오스만 제국은 아나톨리아는 물론 중동, 북아프리카, 유럽 발칸반도까지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중세 유럽이 천 년 동안 ‘암흑의 시대’를 헤매고 있을 때, 튀르크인들이 건설한 셀주크와 오스만 제국은 찬연한 이슬람 문화를 받아들여 세계 문화의 정체를 막으며 수준 높은 중·근세 인류 문명을 주도했다. 더욱이 1453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가 유럽 문화의 교두보였던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을 점령한 후, 튀르크인들은 유럽인들을 지배하고 호령하면서 오스만의 평화 시대를 구가했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어 영국-프랑스-러시아의 연합국에 맞서다 패배했다. 이를 계기로 대제국은 산산조각이 났고 1923년 독립 전쟁을 통해 오늘날의 튀르키예 영토만 겨우 건질 수 있었다.
복합 문화와 종교적 공존이 살아 있는 튀르키예
11세기 새로운 주인을 맞은 아나톨리아는 지난 천 년간 유목과 도시 정주, 이슬람과 기독교, 초원 문명과 지중해 문명, 대륙과 해양이라는 다양한 문명의 이합집산과 종교적 공존, 삶의 절충과 예술적 창의라는 선물을 유감없이 발휘하기 시작했다. 동로마 교회의 총본산인 성소피아대성당은 정복자의 전리품이 되어 모스크로 개조됐지만 본당의 시설과 구조물만큼은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다.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종교적 계율에 따라 본당 예배실의 성모와 예수상, 2층의 인물 성화들은 커튼으로 가리거나 회칠을 해서 숨겨졌다. 특히 성소피아대성당 본당 예배실은 여타의 동방 정교회와 같이 해가 뜨는 정동을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스크로 바뀌면서 예배 방향이 메카를 향해야 했기에 동남쪽으로 살짝 틀어 미흐랍이 설치됐다. 또한 기독교 벽화 손상을 막기 위해 거대한 동판에 알라, 무함마드 등을 새겨 벽면 주위에 걸어두었다. 덕분에 1935년 성소피아대성당이 특별법으로 다시 박물관으로 지정됐을 때, 그간 숨겨두었던 금빛 모자이크 성화와 기독교 유물들이 그대로 복원될 수 있었다.
이슬람을 만난 동방 기독교도 큰 변화를 겪었다. 이슬람의 우상숭배 금기 문화는 동서로마 교회 사이에 이콘(icon)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성화와 성물을 우상으로 보느냐, 아니면 종교의례의 상징으로 허용하느냐 문제는 1054년 동서로마 교회의 분리를 가져왔고, 로마가톨릭교회가 주도한 4차 십자군 전쟁(1204)으로 동방 정교회의 총본산인 성소피아대성당이 약탈당하고 성직자들이 모욕을 당하게 된다. 이후 동방 정교회는 오스만 제국 통치하에서 더욱 안전하고 편안한 종교의 자유를 누렸다. 그리스가 독립한 이후에도 동방 정교회의 총본산을 아테네로 옮기지 않고 이스탄불에 남긴 배경이다. 실제로 오스만 제국은 다양한 종교 공동체의 자치권과 문화적 정체성을 최대한 존중했다. 밀레트(Millet) 제도를 통해 유대인, 그리스 정교인, 아르메니아인 공동체는 중앙정부의 통제나 간섭 없이 랍비나 총대주교의 지휘 아래 종교적 자유와 관습, 문화적 독자성을 법적으로 보장받았다. 중세사회에서는 보기 드문 다문화-다종교 공존 정책이었다. 종교적 자유와 문화적 자치권이 주는 삶의 만족도 때문에 오늘날에도 이스라엘, 미국 다음으로 많은 엘리트 유대인들이 튀르키예 시민으로 살아가면서 대기업과 언론을 소유하고 있으며, 아르메니아 공동체가 이스탄불 경제권의 중요한 길목을 차지하고 있다.
역사, 종교, 일상이 융합된 도시
아나톨리아를 정복한 이슬람교도들은 단순한 문화 공존이나 물리적 융합에만 머물지 않고 축적된 지식과 지혜를 바탕으로 자기 자신의 문화를 창조해나갔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 모스크다. 오스만 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미마르 시난(1489~1588)은 6세기 성소피아대성당 돔의 기능적 구도나 영성적 의미를 본떠 천년 뒤 쉴레이마니예 모스크(1550~1577)를 건축했다. 일반적으로 무슬림들은 예배를 볼 때 양옆의 사람들과 어깨를 서로 맞댄다. 어깨 사이가 벌어져 공간이 생기면 사탄의 통로가 된다고 믿어 빈틈을 만들지 않으려는 것이다. 매일 다섯 번 반복되는 예배를 볼 때는 다섯 신체 부위—코(이마), 두 손, 두 발—가 땅에 닿아야 하므로 모스크의 바닥은 항상 청결해야 한다. 특히 앞줄이 완전히 채워지지 않으면 뒷줄이 만들어질 수 없어, 기둥 없는 중앙 홀에서 신자들을 분리시키지 않는 건축 디자인이 필요했다. 모스크가 돔 건축을 선호하는 이유다. 무아진(이슬람 사원에서 매일 기도 시간을 알려주는 사람)의 꾸란 낭송과 이맘(종교 지도자)의 설교 소리가 돔 천장으로 올라가서 균질하게 내려오는 신비로운 음성은 하늘에서 내리는 신의 음성과 다름없었다.
돔과 높은 첨탑을 가진 모스크 건축을 완성한 오스만 제국은 도심에 독특한 복합 건축군인 퀼리예 (KÜlliye)를 통해 종교와 삶의 유기적 관계와 소통, 삶의 효율성을 극대화해갔다. 수많은 방사형 골목길의 중심 광장이나 높은 언덕 위에 모스크를 건립하면서 적어도 부속 건물 다섯 개를 함께 지었다. 학교(대학), 병원, 목욕탕, 도서관, 여관이 그것이다.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에 자연히 바자르(대시장)가 형성되었다. 상인들이 몰려들고 그들을 위한 숙박시설이 자리 잡았다. 가장 대표적인 퀼리예가 이스탄불 쉴레이마니예 모스크 일대다. 대모스크를 중심으로 이스탄불 대학교와 대학병원이 있고, 16세기에 건축된 오래된 터키탕이 있다. 또한 쉴레이마니예 국립 고서 도서관을 비롯해 호텔 수십 곳이 들어서 있다. 그 주변에는 그랜드 바자르로 더 알려진 세계 최대 실내 시장 ‘카팔르차르슈’가 이스탄불 대학교 담벼락을 경계로 끝없이 펼쳐진다. 개인적으로 유학 시절 경험한 흥미로운 풍경은 이스탄불 대학교의 광장이 해가 지고 나면 순식간에 벼룩시장으로 바뀐 것이다. “진정한 지성이란 한 발은 상아탑 속에, 다른 한 발은 삶의 진흙탕 속에 단단히 딛고 서 있어야 된다”고 했던 13세기 민중 철학자 메블라나 루미의 말처럼, 수백 년간 내려오고 있는 이 풍습에서 학문을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보지 않았던 튀르키예인들의 교육철학을 엿볼 수 있다.
사실 쉴레이마니예 퀼리예에서 가장 눈에 띄는 모습은 골목골목 숨겨져 있는 수많은 크고 작은 카페다. ‘커피(Qahwa)’라는 단어가 아랍어이고 인류가 본격적으로 커피를 음용하게 된 것도 이슬람 신비주의의 수피 성직자들이 밤새 기도하고 염원할 때 마시는 명상 음료로 각광받기 시작하면서였다. 이슬람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던 에티오피아, 소말리아, 케냐, 예멘의 모카 지역이 그 시발점이다. 예멘의 모카에서 집산된 아라비카 원두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 궁정에 진상품으로 공급되었다. 궁정에 파견되어 있던 유럽 외교관들에 의해 1652년 이후 카페 문화가 유럽에 전해졌지만, 이미 1554년 세계 최초의 민간 커피하우스 차이하네가 이스탄불 구도심에 문을 열었다. 그렇게 본다면 이스탄불 도심이야말로 카페의 시작점이고 성지인 셈이다.
전통과 첨단, 이슬람 유산과 유럽 문명의 조화는 도시 구도에서도 확연하게 나타난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스탄불 역사지구(구도심)는 문명 공존의 전통과 이슬람의 가치를 되새기는 반면, 골든혼 맞은편 언덕에 들어서는 신도시는 그야말로 유럽의 어느 도시에 못지않은 첨단 메트로폴리탄의 전형이다. 갈라타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중세와 현대가 공존하고 이슬람과 유럽이 조화를 이루는 이스탄불 특유의 도시가 형성된 것이다. 시작도 끝도 없고, 동서남북, 좌우도 구분되지 않고 무한 반복과 대칭성을 강조하는 아라베스크 디자인이 튀르키예 전통건축의 중심 철학이란 것을 상기할 때, 튀르키예 현대건축 역시 역사성과 복합문화 전통이 반영되어 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슬람 국가에서 세속적 현대 공화국으로
튀르키예는 1923년 이후 공화정을 채택하면서 혁명적인 개혁 정책을 실시했다.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지 않는 세속 국가를 표방하면서 이슬람 율법(샤리아) 대신 서구의 법 체제를 수용했다. 문자 개혁을 통해 수백 년간 써왔던 아랍문자를 버리고 라틴어로 자국 말을 표기하는 법을 공표했다. 이 때문에 100년 전의 자국 역사와 문화를 읽어내지 못하는 문화적 퇴보에도 불구하고 57개 이슬람 국가들 중에서는 가장 빠른 근대화와 유럽화를 성취할 수 있었다. 특히 여성들의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통해 여권 혁명을 이루고 공공장소에서 히잡 착용을 법으로 금지했다. 남성들도 개인의 신앙은 자유롭게 내버려두면서도 공적 장소에서 터번을 쓰거나 수염을 기르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이슬람 전통을 버리더라도 유럽화와 근대화를 국가의 지상 목표로 삼은 것이다. 이러한 국가 이데올로기의 중심에는 독립 전쟁의 영웅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국민국가 사상과 세속주의가 자리를 잡았다.
공화국 창설 100년이 지난 현재 튀르키예는 이슬람화 움직임이 가속화되고 있다. 자신의 종교적 가치를 버리고 서구화를 추구했던 세속화 정책에 대한 시대적 성찰이 확산되면서, 튀르크 기층 문화이자 종족 정체성의 근간인 이슬람의 가치를 다시 주목하게 된 것이다. 종교적 가치를 유지하면서도 서구의 앞선 제도나 사상을 받아들이자는 융합적 사고가 힘을 얻고 있다. 이런 시대적 요구는 보수적인 이슬람 정당에서 출발한 정의발전당(2001년 창당)이 레제프 에르도안 대통령을 중심으로 23년째 장기 집권을 하게 된 배경일 것이다. 이에 공적 장소에서 히잡 강제 착용 금지가 없어지고 박물관으로 지정되었던 성소피아대성당도 다시 모스크로 전환되었다.
튀르키예를 둘러싼 현안들
튀르크인들은 21세기 오늘날에도 여전히 자신의 뿌리와 정체성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누구인가? 동양인가 서양인가?” 튀르크인들을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질문이다. 영토의 97%는 아시아에 있고 고작 3%만이 유럽에 걸쳐 있지만, 튀르키예는 올림픽 예선이나 월드컵 토너먼트에서 유럽팀으로 출전하며 아시안 게임에는 아예 참가조차 하지 않는다. 유럽 안보 동맹체인 나토(NATO)의 맹방이고, 유럽연합(EU)에 가입하기 위해 수십 년째 노력 중이다. 반면 사상적으로는 서양보다 동양에 가깝다. 튀르크어는 한국어에 가장 가까운 알타이 계통이고, 장유유서, 대가족 제도, 남녀 내외 문화, 부모 공경, 충효 사상, 국가 중심주의, 공동체 상부상조, 신뢰 경제, 안방과 사랑채의 분리, 민간의 샤머니즘 풍습 등은 동양을 많이 닮았다. 결국 튀르크인들은 동서문화의 교차로에 자리하여 ‘동양의 정신에 유럽의 옷을 걸친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다.
현재 튀르키예가 처한 가장 큰 문제는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경제위기와 물가고다. 코로나 바이러스감염증-19 팬데믹을 거치면서 악화된 경제 상황은 대외적으로는 시리아 내전에 깊숙이 관여하고, 이스라엘-하마스 전쟁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생겨나는 안보 비용의 과다 지출과 수급 불균형이 주된 원인이다. 러시아는 가장 큰 교역 상대국이고 에너지를 전량 수입하는 중동 시장의 안정은 튀르키예 경제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국내적으로는 인구의 20%에 해당하는 쿠르드 분리주의 무력 투쟁이 발목을 잡고 있다. 이런 위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에르도안 정부는 과감한 정책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시리아 내전 종식으로 들어선 신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면서 전후 복구 참여를 노리고,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종전을 위한 가장 적극적인 평화중재자 역할을 하고 있다. 친서방 중도 노선을 표방하는 튀르키예 외교 방향은 미국과 러시아는 물론, 주변 국가들과의 우호적인 관계 설정에 방점을 두어왔다. 친서방 집단방위 체제인 나토의 맹방이면서도 러시아의 최신 고고도 미사일 방어시스템(S-400)을 전격 도입하는 파격적 행보를 할 수 있는 배경이다.
에르도안 정부는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또 하나의 전략적 카드로 국내 쿠르드 분리주의자들과 세기적인 협상을 시도하고 있다.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쿠르드노동자당(PKK)의 지도자 압둘라 외잘란이 스스로 무장해제를 선언하면서 화해와 공존 협상은 급물살을 타고 있다. 지난 40여 년간 4만여 명의 군경과 민간인의 희생을 가져왔던 PKK의 무장해제는 테러 없는 튀르키예의 국내 안정과 안보 비용 절감으로 경제 발전을 꾀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전망이다. 다만 정부가 에르도안 대통령의 강력한 정치적 라이벌이자 제1야당 공화인민당의 차기 유력 대선 후보인 에크렘 이마모울루 이스탄불 시장을 올해 3월 구속하면서 튀르키예 정치 일정은 대혼란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23년의 장기 집권이 가져온 권력 집중은 언제나 민주화의 가장 큰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튀르키예에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 SPACE, 스페이스,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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