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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다시, 피가 돌다

글
손진
사진
김종오(별도표기 외)
자료제공
이손건축
진행
방유경 기자

「SPACE(공간)」 2025년 9월호 (통권 694호) 

 

©ISON Architects 

 

군산은 1899년 개항되었다. 1876년 일본과 체결된 강화도 조약에 의해 개항된 네 도시(인천, 목포, 군산, 부산) 중 하나로 일제강점기 내내 호남평야의 미곡을 일본 본토로 가져가는 수탈 기지였으며 전국에서 가장 융성한 도시 중 하나였다. 도시계획은 70×100m 정도 크기의 격자 틀을 기본으로 했는데,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주거 형식이 아파트로 전환되면서 시 외곽으로 개발이 진행되어 현재의 확장된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나라 모든 중소도시에 공통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도심 공동화 현상이 이곳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2019년 건축주와 처음 대상지인 영화동(현 구영길)을 방문할 당시 이 자리에는 여덟 개 점집이 있었다. 한때 미군들의 유흥지로 흥청망청했던 거리에 들어섰을 때 사람의 온기는 없었다. 사람이 죽기 직전에 나는 냄새가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삼십여 년에 걸친 도심 공동화의 맨 끝 지점에 와 있어 건물들의 물리적 소멸이 체감될 정도였다.

건축주는 십여 년 전부터 이곳에서 차로 10분 떨어진 호숫가에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성공적으로 운영해왔다. 그는 자신의 오랜 로망이었던 재즈클럽을 원도심에 만들고 싶어 했다. 적합한 장소로 점찍어둔 건물은 원도심 격자 가운데 사거리 모퉁이 건물이었다. 옛날 미군 클럽의 외형이 그대로 남아 있었으나 간판만 ‘연천봉 산신동자’로 대체되어 있었다. 아무런 움직임이 감지되지 않는 원도심에 재즈클럽을 내는 일에는 개인의 로망을 넘어 퇴락한 이곳으로 사람들이 돌아오게 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반영되어 있었다. 고향에 대한 일종의 사명감도 있었겠지만, 십 년 동안 구축한 군산의 인적 네트워크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다면 생각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과 뜻이 맞는 친구들을 모았고, 여러 지역에서 모인 멤버 여섯 명이 법인을 만들어 프로젝트의 주체가 되었다. 변호사, 교수, 의사, 사업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등 다양한 직종으로 구성된 이들은 향후 진행 과정에서 물심 양면으로 전폭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프로젝트가 구체화되던 중, 전국 각지에 있던 여러 지인들이 군산에 정착하며 프로젝트 사이트 주변에 자신들의 공간을 만들게 된 것은 그다음의 일이다. 그들 모두를 통틀어 프렌즈 그룹이라 부르기로 했다.

우리는 가능성을 해당 블록의 내부에서 보았다. 건물은 일제강점기 적산가옥의 틀 위로 7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삶의 흔적들이 켜켜이 덧붙어 원형을 찾아보기 힘든 상태였지만, 사용 가능한 땅들을 촘촘히 잠식하며 밀집된 상태에서 얼핏 보이는 조그마한 공간들의 흐름이 읽혔다. 블록 내부에서 보이는 공간의 잠재적 흐름을 살려내면 피가 통하게 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블록 내부에 먼저 피가 돌게 하여 그 생명력이 외부로 전달되게 하자는 전략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100여 년 동안 적층된 켜들 중 제거할 것과 남길 것을 솎아내는 일이 우선되어야 했다. 모퉁이 클럽에서 시작한 프로젝트는 조금씩 인접한 땅들로 확장되었고, 급기야는 블록의 반대편 도로에까지 이르렀다. 여관으로 쓰이던 1960년대 3층 건물을 매입하여 호텔을 신축하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그라운드 호텔(Ground Hotel)이라 칭하는 도심형 호텔 콤플렉스의 모양새를 갖추게 된 때는 설계가 시작되고 1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공사 전, 철거 후, 공사 후 매스 다이어그램 

 

보전 

1차로 내부를 철거하자 일본식 민가의 속 구조가 드러났다. 상량판에는 1922년이라 쓰여 있었다. 민가의 형식은 갖추었으나 격조를 논할 만한 수준은 아니라고 판단됐다. 대들보를 포함한 몇 가지 커다란 부재를 제외하고는 재활용할 만한 부재가 드물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중요한 판단을 내려야 했다. 먼저 전체 구조를 지속 가능한 형태로 복원하기 위해 소요될 비용을 감수하면서까지 보존할 가치가 있는가였다. 레트로 감성을 추구하며 생명이 거의 소진된 자재들을 재활용하면 어느 정도 비용은 절감되겠지만 물리적 지속성을 보장할 수는 없었다. 고심 끝에, 해당 적산가옥들의 존재가 군산이라는 도시의 태생적 근간이기에 보존 가치는 분명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대신 존재는 유지하되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개입을 하기로 했다. 이 행위에는 ‘보존’보다는 ‘보전’이 적합한 어휘였다.

 

부지 주변 군산 풍경 ©ISON Architects 

 

솎아내기, 그라운드 

블록 내 밀집된 구조물 가운데 유효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해 골라내는 일이 먼저였다. 일단 일본식 민가의 틀을 온전히 유지하고 있는 것을 우선순위로 남기는 원칙을 고수하기로 했다. 그다음 도로변을 따라 전후에 둘러쳐진 조적조와 연와조 파사드 역시 그 시대의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고 판단해 존치했다. 그 외에 산발적으로 필요에 의해 덧붙여진 구조물은 블록 내 숨통을 트기 위해 철거하기로 했다. 블록 북쪽에는 한때 미군들을 접객하던 방 네 개로 이뤄진 건물이 있었다. 그 건물 쪽으로 좀 더 넓은 외부 정원을 만들면 좋겠다는 건축주의 요구에 따라 방을 잘라내고 그 흔적을 건축화해 정원 요소로 삼았다. 그러자 블록 내부에 적절한 외부 공간의 흐름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로써 그라운드(호텔을 제외한 블록 서쪽의 적산 건물군)는 외부 공간의 형식에 따라 크게 두 덩어리로 나뉘게 됐다. 재즈클럽이 접한 ㅁ자 형식의 중정형 공간(그라운드 ㅁ), 그리고 T자 형식의 이탈리안 레스토랑 파라디소 90을 중심으로 하는 열린 공간(그라운드 T)이 그것이다.

 

(왼쪽) 기존 부지, (가운데) 그라운드 중앙에 위치한 기존 창고, (오른쪽) 일부 연와조 및 조적조 파사드만 남기고 철거한 공사 현장​ ©ISON Architects

 

이전의 100년과 이후의 100년 

그다음 문제는 보전을 위해 어떤 공법을 택하느냐였다. 노후된 목구조 부재들을 현장에서 갈아 끼우는 방법과 전체를 해체하여 부재들을 갈아 끼우고 재조립하는 방법 중, 한옥 대목장과 협의해 후자가 합리적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모든 주요 부재에 일련번호를 부여한 후 해체에 착수했고, 장수에 있는 공장으로 옮겨 두 달여 만에 부재 교체와 현장 재조립에 들어갔다. 기존 목구조의 기초 부분은 특히 취약했다. 매립지 위에 만들어진 도시라 지반이 약하고 기초 역시 임기응변으로 만들어져 부실했다. 이에 콘크리트 매트 기초를 전면적으로 적용하기로 했다.

주로 1960~1970년대에 덧붙여진 도로변의 연와조 및 조적조 파사드는 구조를 보전하되 그 모습은 주로 내부에서만 드러내고, 외부는 새로운 재료로 과감하게 둘러싸 구조 보강과 단열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단, 기존 개구부는 가능한 한 원래 크기와 형태가 새로운 파사드에 새겨지도록 하되 깊이감을 주어 양감을 강조했다. 퇴락해가는 원도심에 새로운 외부를 선사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모토는 100년의 세월을 견딘 건물에, 미래의 100년을 물리적으로 보장하자는 것이었다.

 

(왼쪽) 기존 건물의 목구조를 해체한 후 고재와 새 목재를 가지고 재조립했다. (오른쪽) 재조립된 지붕 구조물이 고재와 어울리도록 스테인 처리를 했다. ©ISON Architec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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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과 프로그램 

애초에 체계적인 시장조사와 수요예측에 의한 접근이 어려웠으므로 계획도면을 그리면서 동시에 구체적인 공간계획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호텔의 콘셉트 설정이 중요했다. 호텔의 형식은 일반적으로 매겨지는 등급에 얽매이지 않고 객실을 다양하게 구성하기로 했다. 투숙객의 다양한 연령층은 호텔에서 중요한 요소다. 주변에 늘어나고 있는 게스트하우스들과의 중복을 피하는 것도 고려 대상이었다.

그라운드 호텔이라는 형식은 전체 공간 구조로부터 자연스럽게 추출된 것이다. 그라운드는 기존의 도시 구조가 보전된 형식이고, 신축될 호텔은 이곳과 짝을 이뤄야 했다. 호텔이 설정되고 거기에 맞춰 부대시설을 꾸리는 것이 아니라, 부대시설의 공간적 특성에 의해 호텔이 정의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객실 중 절반은 그라운드에 직접 면해 있어 조용히 은둔하는 방이라기보다는 그라운드의 북적거림과 호텔 방의 고요가 상호 침투하는 곳이다. 나머지 절반은 아트리움을 중심으로 모이도록 했다. 아트리움은 8×1.2m 크기의 장방형 천창을 통해 햇빛, 눈, 비 등 자연의 여러 현상이 ‘재현’되는 외부 공간이다. 30m의 좁고 긴 내부 복도를 지나면 외부 아트리움을 만나게 되고, 그곳을 통해 각자의 방으로 들어간다. 아트리움은 거리의 도시 풍경과 극적으로 대비되는 상징적 공간이자, 주변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각성’의 공간이다. 방들은 높이 1m의 수평선이 제어한다. 그 하부는 화강암, 상부는 도장이나 원목과 합판으로 구성되어 재료의 물리적 내구성이 시간을 견뎌내도록 했다. 호텔들이 늘상 겪는 10년 주기의 리모델링 딜레마에서 벗어나 늘 다니던 기억의 방으로 남기 위함이다. 소도시 호텔에서 방에 대한 기억의 수명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라운드는 먼저 중앙에 위치한 일제시대의 창고에서 시작한다. 다목적 홀로 쓰이는 이곳은 서쪽 입구의 골목으로 진입할 때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는 첫 건물이다. 조적벽에 트러스 구조로 되어 있고, 낡은 원형 상태를 유지했다. 그라운드의 다른 공간들이 주로 상업시설로 채워지는 만큼 이곳은 열린 공간으로 비우고자 했다. 

그라운드 T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파라디소90, 피제리아 델캄포, 스시바 에이와 등으로 채워진다. 이들은 다시 호텔 1층의 로비 겸 카페테리아 트레비아와 짝이 되어 호텔과 접점을 만든다. 전체 콤플렉스 중 도시적 활기가 가장 충만한 곳이 될 것이다. 동쪽으로 난 좁고 긴 골목을 통해 높은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면, 이전에 느슨하게 형성되어 있던 막힌 공간이 ㅁ자형 중정으로 분명하게 정의되어 있고, 그 주위를 재즈클럽 머디, 바 인그리드 그리고 젤라떼리아 노베오들이 둘러서 있다. ㅁ자 중정은 주변 프로그램들이 운영되는 시간대에 따라 융통성 있게 대응할 수 있는 틀로써 적합했다. 중정의 아침은 고요하다. 점심쯤이면 사람들이 젤라또를 들고 들어와 담소를 나눈다. 또 해 질 녘이면 바의 낮은 조도과 적절한 볼륨의 음악이 이곳을 채우게 된다. 주말 저녁에는 재즈 공연을 보러 온 관객들과 바의 주객들이 이곳에서 자연스럽게 섞이기도 한다. 가끔은 제법 큰 규모의 행사가 벌어져 중정과 면한 모든 공간이 가득 채워지기도 한다. 여러 켜와 다양한 형식의 문은 시선과 빛, 또 공기와 음향의 제어 장치로 작동할 것이다.

 

(왼쪽) 철거 후 그라운드 영역의 기초 공사, (오른쪽) 그라운드 ㅁ의 중정 바닥 공사 ©ISON Architects

​

재료 

일제강점기부터 지금 시대까지 군산에서 주로 사용된 재료를 꼽아보았다. 적산가옥에는 주요 부재인 목재 이외에 회벽이나 타일이 주로 쓰였고 가끔 눈에 띄는 1930년대의 모더니즘 건물들에는 시멘트 미장이 주로 사용됐다. 반면 해방 이후의 건물들은 연와조 위에 적벽돌, 타일, 콘크리트 위 도장 그리고 시멘트 미장이 주를 이루었다.

우리는 이들을 프로젝트의 주재료로 사용하되, 색다른 방식으로 조합해 새롭게 표현되기를 기대했다. 예컨대 호텔의 2~3층 상부는 컬러 미장과 시멘트 미장 위에 스프레이를 적용했다. 컬러 미장은 미장 특유의 손맛을 내줄 것이고, 스프레이는 미장면에 표출된 손 작업들의 자취들을 드러내 보여줄 것이다. 그라운드의 바닥은 적벽돌을 헤링본으로 깔되 줄눈 패턴을 강조하기 위해 석분을 채워 깊이를 더했다. 도로에 면한 그라운드의 전면은 붉은 색조가 강한 갈색 타일이 같은 높이를 유지하여 수평의 안정감을 얻고자 했다. 가장 고민된 재료는 지붕이었다. 애초에 기와를 생각했으나 그라운드 지붕들의 집합적 형태가 드러나지 않을 것 같았다. 지붕선은 예리하고 면은 평탄하나 질감은 거칠어야 했다. 장고 끝에 아스팔트 롤을 선택했다. 가장 저렴한 자재였지만 가장 힘든 시공이기도 했다. 재료 조합의 결과는 달랐다. 주변 재료의 합과 여기에 구사된 재료의 합은 같으나 이를 적용하는 계산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네트워크 다이어그램 

 

도시 형상학 

적산가옥과 1960~1970년대의 조적 및 연와조 그리고 신축 건물 등 다양한 요소들의 집합체 전체를 ‘프로젝트 리터닝 군산(Project Re\Turning Gunsan)’이라 부른다. 여기에는 시민들이 돌아와 도심(都心)의 ‘마음(心)’을 회복해주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겨 있다. 이 상이한 요소들을 다루는 전략적 전제는 시작부터 중요한 과제였고, 그 결과는 도시 형상을 구축해 향후 군산이라는 소도시의 현상에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도시 형상학의 정의는 아직 유연하게 열려 있다. 도시의 모양새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의 총체적인 합으로서, 대개 정확한 답을 구하기보다는 느슨한 방향을 만드는 것이라 이해한다.

호텔의 형태는 주변 건물들의 리듬을 깨지 않도록 분절되어 있으나, 강한 양감이 동시에 표현되도록 했다. 강한 겨자색은 건물 전체에 아이코닉한 상징성을 부여한다. 지방 소도시의 호텔이 지녀야 할 미덕이라고 생각했다. 그라운드를 대하는 태도는 좀 더 모호하다. 전체의 합은 이전 구성 요소들의 합보다 크다. 시간대별 각 요소들은 대비되지 않는 대신 하나로 버무려져 제3의 형상으로 드러난다. 이 제3의 형상이 여러 시간대를 아우르는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우리나라 도시들의 형상이 공통적으로 내포하는, 정의 불가능한 모호성이 적극적으로 표출된 형식일 수 있겠다.​ 

 

(왼쪽) 포토스캔을 활용한 공간 및 구조 다이어그램, (오른쪽) 도시적 연결을 보여주는 동선 다이어그램​

월간 「SPACE(공간)」 694호(2025년 09월호) 지면에서 더 많은 자료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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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
손진은 1986년 홍익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1992년까지 이탈리아 베니스 건축대학교에서 수학한 뒤, 스튜디오 프란체스코 베네치아(1993~1995)와 스콥피예 건축사무소(1995~1996)에서 실무 경험을 쌓았다. 1997년 이손건축을 설립하여 작업을 이어왔으며 대표작으로 천사유치원, 손정완 사옥, 운문유치원, 성 프란체스코 회관, 아이뜰 유치원, 하나금융 데이케어 센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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