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공간)」 2025년 8월호 (통권 693호)
가스통 바슐라르에 따르면 흙(terre)은 인간의 원초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질료로, 기본적으로 유희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어린아이가 흙으로 자신의 몽상을 구축하는 놀이에서도 볼 수 있듯, 흙은 산업적이기보다는 인간의 손길이 묻어나는, ‘만들어지는’ 재료이다. 건축가로서 ‘만드는 것’을 주요 과제로 삼는 박희찬은 유기장 전수관이라는 공간 안에 흙이라는 질료가 지닌 원초적인 이미지를 구현해낸다. 한옥을 표방한 건축물 내부에 들어서면 관람객들은 마치 지층의 단면처럼 보이는 흙다짐 벽을 마주하게 된다. 자연의 물성과 낡은 벽체, 오랜 시간을 두드려 완성한 방짜유기 작품들로 구성된 서사의 플롯을 따라가보았다. 편집자

유기장 전수관 외관. ©Studio Heech
인터뷰 박희찬 스튜디오 히치 대표 × 김혜린 기자
김혜린(김): 유기장 전수관을 리노베이션하는 데 처음 요청은 무엇이었나?
박희찬(박): 부지 12만 3,498m2, 건물 13개 동으로 구성된 문경 성요셉 치유마을 내에 위치한 유기장 전수관은 오랫동안 이봉주 선생의 방짜유기 작품을 보관하는 창고 겸 임시 전시 공간으로 쓰였던 기존 건물을 리노베이션하는 작업이었다. 천주교의 성필립보 생태마을과 문경시가 예산을 지원하는 프로젝트로, 인간문화재인 유기장 이봉주의 방짜유기 작품들을 경험하고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을 계획해야 했다.
김: 기존 건물의 상태는 어떠했나?
박: 기존 건물은 기와를 본뜬 지붕, 외관에 덧댄 나무 기둥 등 한옥처럼 보이게 하려는 여러 시도들이 드러나는 건축면적 485m2, 높이 약 7.1m의 건물이었다. 광복 이후부터 산업화가 진행된 1970~1990년대까지 꾸준히 지어졌던 건축양식이다. 독립기념관(1987)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 외부에서는 한옥처럼 보이지만 내부에 들어가면 내부 기둥이 없는 철골구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건축물이 건축적 가치를 획득해 진지한 논의로 연결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다만 ‘한옥처럼 보이는’ 기존 건물은 오랫동안 이 마을에 살면서 이봉주 선생의 가족들이 만들고, 가꾸어온 건물로, 깊은 심리적 유대감이 깃든 공간이었다. 우리의 계획은 자연스럽게 기존 건물과 새로 만들어지는 볼륨이 나란히 병치된 평면으로 이어졌다. 기존 건물의 외관을 온전히 보존하기로 했고, 이에 이봉주 선생과 그의 가족들은 매우 기뻐했다.

유기장 전수관 내부 모습
김: 설계 전략과 의도는 무엇이었나?
박: 설계 초기부터 이봉주 선생과 소장품들을 면밀히 아카이빙 했고, 방짜유기 작품들의 기능과 크기, 성격에
맞는 공간을 계획하고자 했다. 또 오래전부터 사용되어 오던, 이미 실재하는 공간을 어떻게 점유하고 개입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으로 건축 작업이 시작되었다. 외관을 보존하기로 했기 때문에, 기존 건물의 외관은 의도적으로 물리적 작업에서 배제되었다. 대신 내부 공간에 커다란 두 개의 흙 볼륨과 하나의 원형 계단을 배치해, 새로운 건축 공간과의 관계가 만들어지게 했다. 기존 건물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새롭게 조직되는 건축적 관계는 옛것과 새것(old and new), 일반적인 것과 일반적이지 않은 것(ordinary and extraordinary), 우리가 건축이라고 믿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the architectural and the unarchitectural) 사이에서 새로운 경험으로 연결된다. 거친 질감의 흙다짐 벽들은 엄격하게 정교하고 아름다운 방짜유기 작품을 위한 배경으로 존재하게 했다.
김: 방짜유기 작품들의 성격에 맞는 공간을 계획했다고 했다. 작품의 성격이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설명해 달라.
박: 이봉주 선생이 방짜유기를 만드는 방식은 절대적 예술의 표현에 가깝다. 쇠를 녹여 주물에 부어 형태를 만들지 않고, 오직 손으로 쳐서 원하는 형태를 만들어낸다. 나는 이 작품을 위한 배경이 방짜유기처럼 완전히 순수한 건축적 형상으로 존재하기를 바랐다. 한 층 한 층 다져 올려 형상을 만드는 흙다짐 벽을 구축하는 과정은 방짜유기 작품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닮아 있다. 기존 건물 내부에 새롭게 점유되는 공간은 지역의 흙을 이용한 흙벽, 구조용 집성목, 표면이 정제되지 않은 콘크리트와 철로만 구성되며, 재료의 물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공사 중인 현장

기존 건물과 새로 만들어진 흙다짐 벽이 병치된 통로 공간. ©Studio Heech
김: 흙다짐 벽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전통 흙 건축의 명맥을 이어온 이규봉(건축연구소 알콘 대표)과 협업했다. 협업의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박: 이규봉은 과거 기용건축에서 인턴 생활을 할 때, 옆자리에 앉아있던 팀장님이었다. 말을 붙이기도 어려운 건축 선배였는데, 한국의 흙다짐을 이 프로젝트의 주요 재료로 사용하겠다고 결심한 이후 이규봉과의 협업을 그렸다. 이규봉은 같은 기용건축 출신인 고 신근식과 ‘아키떼르’라는 회사를 설립하며 흙 건축에 매진해왔었다. 2011년 신근식 교수가 사고로 작고한 이후 흙 건축과 거리를 두다가 이번 유기장 전수관 프로젝트로 다시 만났다. 흙을 다져 쌓아 올리는 흙다짐 공법은 지극히 원초적인 구축 방식이다. 건축가로도 활동하는 이규봉과 기용건축 출신의 건축사들이 팀을 이뤄 흙을 다져서 올리는 구축의 과정은, 우리가 생각하는 건축의 근본을 다시 생각하게 했다. 결국 우리 모두는 ‘만드는 사람들’이다. 시공자, 건축가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한 켜 한 켜 정성을 다해 다져 올린다.
김: 기존의 단일한 공간에 벽을 세워 볼륨을 만들고, 그 사이사이를 관람객들이 걸어다니게 한다. 또 계단을 만들어 수직 동선을 추가했다. 전체 동선 시나리오가 궁금하다.
박: 방문객들은 옛것(기존 건물)과 새것(새로 만들어진 다짐흙 볼륨) 사이를 자유롭게 유영하면서 이봉주 선생의 유기 작품들을 만나게 된다. 통로의 폭은 의도적으로 너무 넓지도, 좁지도 않은 1.2~1.3m로 설정했다. 통로를 지나며 관람객들은 종교를 위한 성물과 악기, 생활 유기, 좌종을 직접 쳐보고 소리를 체험하는 명상 공간들을 순차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김: 아름지기 기획전 〈방(房) 스스로 그러한〉(2024)에서는 전통 마감 공법을 연구해 모듈화한 목조심벽 패널을 만들었다. 이번 작업에서는 흙의 어떤 지점을 탐구했나?
박: 지속가능성을 최우선 목표로 하여 흙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한옥을 모방하는 기존 건물과는 다르게 순수한 물성과 엄격한 구축의 법칙으로 만들어지는 구조물만이 또 다른 차원의 예술인 방짜유기 작품의 배경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또 나는 흙을 전통적 소재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항상 현대건축의 재료로 흙이 어떻게 활용되고 현대건축의 담론에서 논의될 수 있는지 살핀다. 오래전부터 흙을 연구한 것도 아니다. 단지 프로젝트에 가장 적합한 재료 중 하나가 흙이라고 생각해 흙을 탐험했다. 흙은 역사적으로 한국 건축의 주요 재료로 쓰여왔다. 한옥 기둥과 기둥 사이 마감재로 쓰인 목조심벽, 흙을 쌓아 만든 담, 온돌 구들장을 덮었던 흙까지. 흙은 우리 민족의 삶, 정서적 유대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지구온난화가 심각한 위협이 된 이후, 큰 고민 없이 콘크리트에 의지해 무엇인가를 지어내는 것이 오히려 세련되지 못한 건축가의 태도가 되어가는 시대를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흙다짐은 기나긴 과정을 수반한다. 흙다짐을 위해 지역의 흙을 고르고 준비하는 오랜 과정을 통해, 다시 한번 근본적인 건축의 즐거움과 배움을 경험하고 싶었다.

A동 레벨 1, 종교, 악기를 위한 전시 공간

A동 레벨 2, 생활 유기를 위한 전시 공간
김: 흙다짐 벽의 시공 과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달라.
박: 흙다짐 공법에 적합한 점토 함량을 가진 흙을 구하는 과정부터 시작된다. 지역마다 특유의 흙 색깔이 있는데 강원도의 흙 색깔이 어둡다면, 남쪽의 흙은 밝고 붉은색을 띤다. 일반적으로 점토양이 15~20% 함유된 흙이 공법에 적합한 흙이다. 보통 한국의 흙은 점토 함량이 10~15%가량인데, 다행히 문경의 흙이 적절한 점토양을 함유하고 있었다. 이렇게 선별해낸 흙에서 불순물을 제거하고, 적합한 수분 함량을 유지하게 한다. 흙다짐 벽의 안정성을 위해 소량의 석회 또는 시멘트를 첨가하기도 한다. 그런 다음 현장에서 콘크리트 거푸집과 유사한 형태의 형틀을 만든다. 램머 기계의 진동으로 발생하는 측압을 견디고 효율적으로 시공이 이루어지도록 견고함을 유지할 수 있는 형틀 계획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이후 형틀에 흙을 부어 넣은 후, 램머 기계의 진동으로 다져 흙을 압축하면서 켜를 만든다. 유기장 전수관에서는 글루램 목구조체와 결합된 형틀 시스템을 제안했다. 목구조가 흙다짐 벽을 위한 형틀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구조를 담당한다. 보통 양생 기간은 한 달 이상 걸리고, 양생하면서 흙다짐 벽은 견고한 압축강도를 가지게 된다.
김: 일반적인 흙벽과 이번 작업에서 활용된 흙다짐 공법은 어떤 차이점이 있나?
박: 우리가 알고 있는 한옥의 벽체는 주로 목조심벽으로 만들어진다. 하지만 흙다짐 공법 역시 우리 건축의 전통 안에서 사용되어왔다. 토담집이 대표적 예이다. 흥미로운 점은 동양과 서양이 매우 흡사한 공법을 통해 구축의 재료로써 흙을 사용해왔다는 점이다. 목조심벽 공법도 서유럽에서는 와틀 앤 도브라는 공법으로 널리 사용되어왔다. 이번 작업에서 기존 전통의 흙다짐 공법을 사용한 현장과 달랐던 점은, 거의 모든 작업이 실내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흙다짐 공법은 본래 외부 날씨에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장마철에 시공이 어렵다. 형틀을 만들고 흙을 부을 때, 흙의 수분양을 엄격하게 조율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건물 안에서 흙을 다졌기 때문에 외부 기후로부터 차단될 수 있어, 더 나은 조건에서 시공할 수 있었다.

Two different poche details. ©Studio Heech

Section and building system. ©Studio Heech
김: 흙다짐 벽은 다른 건축자재에 비해 구조나 강도 면에서 약하다는 인식이 있는데, 실제로는 어떠한가? 또한 흙다짐 벽만의 강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박: 흙다짐 벽은 압축력이 매우 강하다. 벽체 내부에 철근을 보강하고 시멘트를 첨가하면 더욱 강한 압축 성능을 가지게 된다. 물론 철근콘크리트와 같은 인장 성능을 기대할 수 없다. 하지만 콘크리트에 비해 흙은 지속가능한 소재이다. 지역의 흙과 지역의 노동력을 이용해 다짐 흙벽을 만드는 과정과 행위는 그 자체로 지역사회와 환경에 뿌리를 둔다. 흙벽은 단열 성능이 우수하고, 자체적으로 수분양을 조절하기 때문에 습도 조절 성능이 탁월하기도 하다. 유기장 전수관에서도 경험할 수 있듯 흡음 성능도 뛰어나다. 물론 콘크리트에 비해 흙이 월등히 우월한 소재라고 말할 수 없고 비교도 무의미하다. 다만 우리 한국의 문화와 역사에서 흙이 가진 감정적 연결 때문에 특별한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김: 해외에서는 흙을 사용한 현대적 건축물이 많아지는 데 반해, 한국에서는 아직 그 사례가 많지 않다. 한국 흙 건축의 전망에 대해 어떻게 바라보나?
박: 한국과 같이 여름 겨울의 온도차가 40도 이상 차이가 나는 혹독한 기후를 가진 지역에서 흙이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건축 소재가 될 수 있는지에는 의문을 가지기도 한다. 외부에 쓰였을 때 어떻게 시간에 반응하고 지속 가능할지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프로젝트가 특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존 건물이 단열층을 형성하고 외부 기후로부터 내부를 보호한다. 혹독한 기후와 별개로 온전히 지역의 흙이 구축의 소재로 어떻게 활용되며, 어떤 질감을 표현할 수 있는지 탐험할 수 있었다.
김: 스튜디오 히치는 그간 전통적 재료와 새로운 재료에 대한 탐구, 구조에 대한 집요한 실험, 공간의 서사성 등 다양한 주제를 경유해왔다. 이번 작업에서는 어떤 가치를 탐구했나?
박: 우리는 프로젝트 마다 그만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고 믿는다. 그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재료에 대한 연구로 귀결된다. 특별히 특정한 재료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또한 특정한 재료를 레퍼토리처럼 쓰는 건축가의 태그를 가지고 싶지도 않다. 매 프로젝트마다 다른 이야기와 다른 재료에 관한 연구가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는 직접 한 켜 한 켜 쌓아 올리는 흙다짐 공법을 실천하는 선배 건축가들(이규봉 소장과 아키테르)과의 협업으로 완성되었다. 내부에 사용된 조명, 핸드레일, 가구, 상징 조형물을 위한 장치들을 이봉주 선생과 그의 아들이자 방짜유기 전수자인 이형근 선생과 협업하여 제작했기에 더 가치 있는 작업이었다.
B동, 명상을 위한 좌종 체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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