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공간)」 2026년 1월호 (통권 698호)

강해성+문소정+한경태, ‘이동하는 모듈러 만물상’, 2025
〈2025 부산현대미술관 플랫폼_나의 집이 나〉
부산현대미술관
2025. 11. 29. ~ 2026. 3. 22.
소멸과 축소의 시대, 짓기와 거주하기▼1
지방은 소멸하고 도시는 비어간다. 성장을 전제로 팽창해온 도시에 대한 낙관이 수정되고 있는 시대다. 〈2025 부산현대미술관 플랫폼_나의 집이 나〉는 이러한 상황을 도시·건축적 상상력으로 다시 살펴볼 것을 제안한다. ‘주거’를 통해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를 모색하고, ‘거리’를 돌봄이 닿는 범위로 축소하고, ‘건축’을 감당할 수 있는 규모의 자원 순환 시스템으로 재구성하는 축소지향 전략이다.

서울퀴어콜렉티브, ‘우리는 모두 팔십에 서로의 요양보호사가 되어 있지 않을까?’, 2025

포자몽, ‘마이코셀 유니버스: 균류와 인간의 공존’, 2025
작아지는 세계, 다시 짓는 삶의 구조
3회차를 맞은 부산현대미술관의 연례전인 ‘플랫폼’은 ‘작아지는 세계, 다시 짓는 삶의 구조’라는 주제 아래 2025년 3월 전시 참여자 공모를 진행했다. 공모 요강에서 밝힌 전시의 지향점은 명확했다. 모든 것을 갖춘 공간이 아니라 필요한 관계와 기능만을 선택적으로 담는 ‘축소지향적 공간’을 상상해보자는 것이다. 전시를 기획한 김가현(부산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은 여기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로 알래스카의 소도시 휘티어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상을 꼽았다. 200여 명에 달하는 휘티어 주민의 대부분이 14층짜리 아파트 안에서 생활하는 영상에는 집, 마트, 세탁소부터 병원, 교회, 학교, 경찰서, 우체국, 시청까지 모든 공간이 아파트 안으로 들어온 모습이 담겼다. 그는 “도시가 한 지붕 아래 축소된 극단적 사례를 통해 우리나라 지방 도시의 미래를 떠올리게 됐다”고 전하며, “덜어냄으로써 더 많은 관계, 더 깊은 돌봄, 더 지속 가능한 구조로 나아가는 미래를 탐구하고자 했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축소를 결핍이 아닌 전환, 회복, 재구성을 위한 전략으로 취한 이번 전시는 ‘축소도시’의 삶을 체험하는 데 방점을 두었다. 이는 파빌리온 전시가 난해하다는 관람객들의 피드백과 모형과 패널 중심의 기존 건축 전시와의 차별성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공모 단계에서도 건축가, 예술가, 연구자 등이 협력해 다학제 팀을 구성하도록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선정된 열 팀은 건축, 디자인, 조각, 설치, 사운드, 미디어아트, 인류학, 생물학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전문가들로 구성됐다. 전시 매체도 증강현실(AR), 게임, 인터랙티브 등 첨단 기술과 실제 건축자재들이 동원됐다. 이로써 전시장은 관람객들이 걷고 접고 밀고 통과하며 상호작용하는 체험 공간으로 전환된다. 미술관 로비와 야외정원, 1층과 2층 전시실까지 넓은 무대를 활용하는 만큼, 특정 주제나 섹션으로 구분하지 않고 개별 작품을 자유롭게 체험할 수 있는 여유로운 공간으로 구획된 것이 특징이다.

랩.WWW, ‘함께 짓는 도시’, 2025

유림도시건축, ‘인피니트 루프: 도시연대기’, 2025
현실에서 길어 올린 이야기들
전시는 도시 리서치를 기반으로 한 작업과 공간을 구축하는 건축적 방식을 탐구한 작업으로 크게 구분된다. 리서치 중심의 작업들은 대체로 부산 현지에서 수집한 물건과 연구 결과를 한데 모은 설치 작업으로 제시됐다. 공감각의 ‘변화하는 도시, 다시 쓰이는 삶’은 도시를 걷는 행위에 천착해 변화하는 부산 원도심의 골목을 재현했다. 공사용 비계 구조물로 만들어진 파빌리온 사이에는 현장에서 채집한 영상과 사운드도 설치됐다. “기록이 있어야 도시가 기억된다”는 이들의 설명처럼, 소멸하는 원도심의 공감각적 아카이브에 집중한 작업이다. 2층에 전시된 더 파일룸의 ‘댓츠 마이 네이버’ 역시 전국에서 소멸위험도가 가장 높은 지역인 영도를 대상으로 삼았다. 이들은 마을을 지켜온 주민, 빈집을 채우는 이주노동자, 조선소와 철공소가 만드는 산업 풍경, 이끼와 잡초 등 인간과 비인간 존재들로 이루어진 복합적인 도시 생태계를 다층적으로 경험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설치물 외에도 리서치 과정을 담은 출판물, 증강현실 등으로 매체를 확장했는데, 공감각의 파빌리온이 기하학적으로 완결된 구조물로 지어진 반면,
더 파일룸은 여러 설치물들이 분산되어 있어 관람객이 느슨한 관계망 안에서 서사를 해석하도록 제안한다.
앞선 두 팀의 작업이 도시 리서치를 통해 소멸을 긍정의 시선으로 끌어안고자 시도했다면, 리슨투더시티의 ‘임장크루-갭투-초품아-마피-강남불패: 지역소멸과 욕망의 도시’는 보다 근본적으로 인구 감소와 지역 소멸의 원인을 파헤친다. 이들은 지역 소멸이 지역간 부동산 격차, 문화 인프라 부족과 같은 불평등에서 기인한다고 지적하고, 빅데이터 분석을 거쳐 인터랙티브 설치, 인포그래픽, 게임으로 전시를 구체화한다. 관람객이 센서에 손을 가까이 대면 대형 스크린 두 곳에서 각각 강남 3구와 해운대 지역의 부동산 실거래가가 노출되는 설치작, 머신러닝을 기반으로 30년 후 서울과 부산의 부동산 가격 격차와 출산율 관계를 보여주는 인포그래픽 영상, 부동산 투자 과열 속에 등장한 갭투·초품아·마피▼2와 같은 신조어를 맞추는 게임까지. 자본주의 사회의 불평등이 초래한 현실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리슨투더시티의 작업은 도시 공간에 작용하는 권력 구조를 데이터를 통해 가시화하는 한편, 물리적인 구조물 없이도 유쾌하고 입체적인 방식으로 메시지를 증폭할 수 있는 영민한 해법을 보여준다.

주현제바우쿤스트, ‘콘크리트 유토피아’, 2025

에이디에이치디, ‘사이, 너머’, 2025 ©Bang Yukyung
축소지향적 공간을 체험하는 방법들
공간의 건축적 가능성을 탐구한 작업들은 전시장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로비에 전시된 에이디에이치디의 ‘사이 너머’는 바퀴가 달린 가변형 모듈 구조물을, 2층에 전시된 랩.WWW의 ‘함께 짓는 도시’는 종이접기를 하듯 증강현실 안에서 접고 펼칠 수 있는 가상의 대지를 선보였다. 재료, 형태, 물성과 같이 건축의 공간적 가능성을 보다 원론적으로 탐구한 작업들도 눈에 띄었다. 1층에 설치된 유림도시건축의 ‘인피니트 루프: 도시연대기’는 공기를 주입한 에어셀 아치 모듈로 곡선 터널을 제작했고, 야외정원에 설치된 주현제바우쿤스트의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도시 건설 과정에서 나온 폐흄관을 재활용해 아이들이 놀이 방법을 스스로 탐험하는 체험 공간을 조성했다.
한편, 공존과 돌봄의 문제를 물리적으로 구조화하고자 시도한 작업도 소개됐다. 포자몽의 ‘마이코셀 유니버스: 균류와 인간의 공존’은 영도의 빈집에서 채취한 곰팡이 균을 전시장 안에서 배양한다. 온도, 습도 등의 데이터를 인공지능으로 분석해 인간과 균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상황을 파빌리온 표면에 실시간으로 투사한 작업이다. 서울퀴어콜렉티브의 ‘우리는 모두 팔십에 서로의 요양보호사가 되어 있지 않을까?’는 의료용 의자들이 서로 기대고 연결되어 있는 낯선 풍경을 통해 돌봄으로 구축된 축소도시의 모습을 표현한다.

공감각, ‘변화하는 도시, 다시 쓰이는 삶’, 2025
소멸을 전제할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인구 감소와 지역 소멸의 문제를 직시한 이번 전시는 정량화된 수치와 데이터를 넘어서는 상상력을 작가들에게 요구했다. ‘소멸’을 전제로 할 때 비로소 발견되는 가치들, 그 토대 위에서 구축해야 하는 연대와 공존의 모습을 말이다. 이러한 요청에 가장 적극적으로 응답한 작업은 강해성+문소정+한경태 팀의 ‘이동하는 모듈러 만물상’이다. 이들은 인구 소멸이나 도시 축소의 현상에 수반되는 ‘이주’ 행위에 주목했다. 만물상 트럭을 타고 부산 시내를 옮겨 다니며 이주로 인해 버려지는 물건을 물물교환을 통해 모으고 그에 얽힌 개인사를 수집했다. 정량적 수치로 포획되지 않는 이주의 서사와 내력을 아카이브하면서 사람들과 나눈 대화는 서로를 위로하고 치유하는 수행적 과정이자 연대의 메시지로 확장된다. 쓸모를 다한 물건으로 채워진 만물상 트럭은 소멸의 서사로 쌓아올린 가변적인 이동형 주거 공간이자 돌봄, 자원 재순환, 임시 주거와 같은 다층적인 문제들을 포섭하는 기억의 구조물로 전환된다.
이처럼 다양한 주제로 뻗어가는 도전에도 불구하고 전시는 작품들 간에 내용과 형식, 밀도와 완결성에 차이를 드러냈다. 이는 자유로운 탐색을 의도한 공모 방식이 지닌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특히 건축적 공간을 탐구한 작업들의 경우,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적확한 물성으로 구현되었는지 아쉬움이 남는다. 포자몽은 ‘반지하 원룸에 함께 살고 있는 곰팡이’라는 초기 서사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인공지능 학습 과정에 치우친 나머지 균과 인간의 상관관계를 직관적으로 파악하기 어려웠고, 초고령 사회를 배경으로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 서울퀴어콜렉티브의 작품은 고정된 설치물로 구현되어 체험을 중요하게 보았던 전시 기획에 적절히 대응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에 반해 도시의 내적 관계망을 파악하고 내러티브를 드러낸 리서치 기반의 작업들은 주제와 표현 방법에 다양성을 드러내며 진일보한 실천을 보여주었다.
박은지(더 파일룸)는 “인구소멸지역이라는 낙인이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도시개발을 합리화하는 발판이 되어서는 안 되며, 시대의 변화 속에서 유기적으로 재조직되는 공동체와 생태계의 공존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한다. 관광업과 같이 지역과 무관한 산업을 육성하느라 시간과 비용을 낭비하는 사이, 도시를 지탱하고 있던 생태계와 역사가 파괴되기 때문이다. 인구 감소와 도시 소멸을 ‘문제’로 인식하는 순간 많은 가능성과 진실은 묻히게 된다. 소멸과 축소를 긍정의 언어로 전환한 이번 전시는 학자, 전문가, 행정가들의 언어 속에 가려진 현실을 들추도록 촉구한다. 판단을 유보하고 가능성을 탐색할 거리를 갖는 것. 신문이나 논문이 아닌, 동시대 예술이 성취할 수 있는 미덕이 여기에 있다.

리슨투더시티, ‘임장크루-갭투-초품아-마피-강남불패: 지역소멸과 욕망의 도시’, 2025

더 파일룸, ‘댓츠 마이 네이버’, 2025
_
1 글 제목에 등장하는 ‘짓기와 거주하기’는 리처드 세넷의 책 제목(Building and Dwelling: Ethics for the City)에서 가져왔다.
2 갭투는 매매 가격과 전세 가격의 차이가 작은 주택을 전세를 끼고 매입한 뒤 시세차익을 노리는 투자를 말한다. 이때 갭(gap)은 주택 매매가와 전세보증금의 차이를 뜻한다. 초품아는 초등학교를 품은 아파트의 줄임말로 아파트와 학교가 바로 붙어 있으면서 도보 동선에 차로가 없는 아파트를 뜻한다. 마피는 마이너스 프리미엄의 줄임말로 분양가보다 낮은 가격으로 분양권을 팔아 손해를 보는 상황을 의미한다.
▲ SPACE, 스페이스, 공간
ⓒ VMSPAC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