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공간)」 2026년 1월호 (통권 698호)

비토리아-가스테이스 파빌리온, 세바스티안 바요의 유토피아: 진입 금지(2025)
2025 무각-바스크 국제건축비엔날레
빌바오, 산세바스티안, 비토리아-가스테이스 일대
2025. 10. 9. ~ 2026. 2. 22.
제5회 2025 무각-바스크 국제건축비엔날레가 ‘공중누각, 혹은 오늘날 유토피아를 짓는 법’을 주제로 빌바오, 산세바스티안, 비토리아 세 도시 일대에서 열렸다. 12개 팀이 참여한 메인 전시, 〈Eu-topías, Ou-topías〉와 각 도시에 설치된 세 개의 파빌리온은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비판적 상상력을 통해 우리 시대의 유토피아를 질문하고 모색하는 데 집중한다. 유토피아를 상상하는 것은 왜 중요한가? 올해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의 휴머나이즈 월처럼 접경지인 바스크에 ‘벽’을 세운 이유가 무엇일까? 2회 연속 비엔날레를 이끈 큐레이터 마리아 아라나 수비아테와 비토리아-가스테이스의 파빌리온 ‘유토피아: 진입 금지’를 설계한 건축가 세바스티안 바요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비토리아-가스테이스 파빌리온, 세바스티안 바요의 유토피아: 진입 금지(2025)
인터뷰 마리아 아라나 수비아테 큐레이터, 세바스티안 바요 건축가 × 김보경 기자
경계, 단절이 아닌 만남의 영토
김보경(김): 대부분의 건축비엔날레가 도시나 지역, 다루는 분야를 결합한 이름을 사용하는 반면, 무각-바스크 국제건축비엔날레(이하 무각)는 바스크어로 경계를 뜻하는 ‘무각’을 공식 이름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이며, 이 명칭이 이 비엔날레의 정체성과 방향을 어떻게 규정한다고 보는가?
마리아 아라나 수비아테(아라나): 바스크는 작은 지방이지만 뚜렷한 문화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스페인과 프랑스 두 국가에 걸쳐 있는 이곳은 정치적·사회적·문화적 접경지대다. 그런 점에서 이 비엔날레의 핵심 개념을 ‘경계’라 설정했고, 이를 명칭의 일부로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경계는 사람과 사상의 이동을 가두거나 막는 공간이 아닌, 오히려 지식, 지혜, 문화가 뒤섞이는 사이 공간이자 전이적 영토를 뜻한다.
무각은 건축, 예술, 사회학, 그리고 여타 학문 분야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작동한다. 이는 다른 분야의 지식과 감수성, 그리고 대중과의 융합, 대화, 교류를 통해 경로를 가로지를 때 건축이 더욱 풍요로워진다는 믿음에 기반한 것이다. 건축의 미래는 정확히 그 가장자리에서 발생하는 융합적 관계 속에 놓여 있다고 본다.
김: 다른 국제건축비엔날레와 구별되는 바스크라는 독특한 지역적 상황이 만들어낸 무각만의 특징이 있다면 무엇인가?
아라나: 무각은 스스로를 개방적이고 협력적인, 다양한 목소리가 수렴되는 실험의 장으로 정의하며, 학계와 시민 사이의 만남을 이끌어내려 한다. 특히 바스크 주정부 주택건축국의 주도로 출범한 행사인 만큼, 국경을 넘는 대화를 위한 플랫폼이 되고자 했다. 바스크가 가진 접경지대라는 특성하에 상호 학습을 장려하고, 국경 너머의 논쟁과 감수성을 포용함으로써 말이다. 이번 회차에서 프랑스 남서부의 문화 프로그램들과 파트너십을 공고히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산세바스티안 파빌리온, 이자스쿤 친칠라 아키텍츠의 가벼움과 고발: 여성적 유토피아로서의 바느질(2025)

유토피아: 진입 금지 설치 장면
김: 제4회에 이어 제5회까지 연속으로 무각의 큐레이터를 맡았다. 제4회차의 주제인 ‘재건, 재거주, 재고’가 어떤 문제의식을 제기했으며, 이는 제5회차의 주제인 ‘공중누각, 혹은 오늘날 유토피아를 짓는 법’에서 어떻게 연결되고, 확장됐나?
아라나: 두 회차에서 공통적으로 파괴적인 현실 속에서 건축이 수행해야 할 역할에 대해 고민했다. 또한, 건축을 단순히 아름다운 조형이 아닌,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고 정치, 경제, 환경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시대의 거울이자 행위자로서 바라보았다. 지난 회차에서는 파괴적이면서도 재건적인 건축의 이중성에 주목해, 위기 속 더 회복력 있는 공동체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어떤 사회적·윤리적 가치가 필요할지 물었다. 기후·사회 위기 속에서 대담하고 전복적인 창의성이 나타나고 있었고, 이로부터 다면적이고 협력적인 건축이라는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 제5회차에서는 더 낙관적인 태도로, 사회적·공간적 변혁을 추동하는 비판적 상상력에 집중했다. 유토피아는 흔히 순진하거나 도달 불가능하다고 치부되지만, 지금의 많은 도시, 정치 제안들이 유토피아적 꿈에서 태어났다. 오늘날에는 효율성과 실용주의적 논리가 바람직한 미래를 사유하는 능력을 대체해버린 듯하다. 폴 리쾨르가 경고했듯, “유토피아 없는 사회는 목적 없는 사회”다. 이에 제5회 무각은 유토피아적 사유와 상상력, 집단적 변혁의 도구로서 건축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고자 한다.

유토피아: 진입 금지에 모인 사람들 ©Sebastián Bayo
보이지 않는 장벽을 드러내는 벽, ‘유토피아: 진입 금지’
김: 비엔날레의 개최지인 빌바오, 산세바스티안, 비토리아 중 비토리아에서는 처음으로 선보이는 설치물인 ‘유토피아: 진입 금지’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달라.
세바스티안 바요(바요): 이 작업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35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사람들을 분리하는 장벽을 계속 쌓고 있으며, 그 벽을 넘을 수 없는 이들에게 유토피아는 언제나 저편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했다. 비토리아의 비르헨 블랑카 광장을 가로지르는 길이 70m, 높이 4m의 벽은 광장을 반으로 갈라 통행과 시야를 차단한다. 도시 공간을 변형해, 기획된 혹은 자발적인 활동 모두를 수용하는 새로운 내밀한 영역들을 만들어낸다. 닫힌 컨테이너가 아닌 도시에 완전히 열린 이 구조물은 누구나 자유롭게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플랫폼이 된다. 실제로 설치 기간 내내 수 많은 개인들과 단체의 만남의 장소이자 활동의 플랫폼이 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온갖 종류의 자발적인 시위와 활동이 조직됐다. 이는 곧 ‘파빌리온은 무엇인가’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뿐 아니라 건축가가 건축가를 위해 주로 일방향적으로 콘텐츠를 전달해온 건축비엔날레의 성격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다. 특히 비토리아 시민들이 이 프로젝트에 깊이 관여했다는 점이 무척 감동적이었다. 올해 비토리아에서 처음으로 비엔날레를 개최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이곳은 내가 자란 도시기 때문이다.

빌바오 파빌리온, AMA 아키텍추럴 오피스의 에체노이(2025) ©4
김: 당신에게 ‘유토피아’란 무엇이며, 그 개념이 이 파빌리온의 출발점과 설계 방식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
바요: 많은 경우 유토피아적 프로젝트는 이전에 없던 패러다임이나 새로운 ‘완벽한’ 사회를 원점에서부터 구축하는 방법을 제안한다. 나는 이번 제안을 통해 초점을 이미 ‘유토피아적’이라고 여겨지는 우리 사회로, 그러한 우리 사회의 한계로 옮기고 싶었다. 우리가 서로 관계 맺으며 살아가는 방식을 규정하는 장벽들에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 또한 답을 제시하기보다는 성찰을 위한 화두를 던지고자 했다. ‘유토피아는 배타적일 수 있는가?’, ‘국경 없는 세상을 상상하는 것은 얼마나 유토피아적인가?’, ‘이 모든 것에서 건축과 건축가의 역할은 무엇인가?’, ‘새로운 유토피아를 구상하는 것과, 우리가 이미 살고 있는 사회를 개선하는 것. 둘 중 어느 쪽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가?’ 지그재그로 꺾인 벽의 배치는 비토리아의 중세 성벽의 연장선처럼 보인다. 방어 목적으로 지어진 도시 성벽은 언제나 도시 확장의 한계선이었으며, 이를 철거하는 것은 사회적·도시적 진보의 상징이 되었다. 나는 벽을 활용함으로써 우리가 진보를 당연시하는 태도가 얼마나 쉽고 빠르게 퇴보하게 만들 수 있는지 성찰하게 하려 했다. 사회적 진보는 더디고 힘겹게 쟁취되는 것이며, 사회가 계속 진보하는 유일한 길은 비판적이며, 창의적이고, 대화에 참여하며, 공감하는 시민을 양성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비토리아 시민들이 표현의 자유를 통해 물리적인 ‘벽’을 넘어 치열한 논쟁을 만들어낸 과정은 이를 증명하는 일종의 사회적 실험이었다.

〈Eu-topías, Ou-topías〉 전시 전경
김: 올해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에서는 토마스 헤더윅이 제안한 휴머나이즈 월이 ‘분단의 역사와 정치성을 가진 한국에서 벽을 세운다’는 점에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반면, 비토리아의 시민들은 유토피아: 진입 금지에 열정적으로 참여해, 프로젝트가 공식적으로 발표되기 전에 이미 벽의 본래 붉은색이 남아 있는 부분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들었다. 이처럼 같은 ‘벽’이라는 매체가 서로 다른 도시·문화·정치적 맥락 속에서 전혀 다른 해석을 거쳐 사용되었고, 이것이 아주 다른 반응을 낳았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바요: 비토리아 시민들의 반응은 확실히 활기찼지만, 모두가 이 프로젝트에 열광한 건 아니었다. 이 또한 논란이 된 제안이었고, 우리는 그 급진적인 성격과 스케일, 그리고 주제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을 것이라 예상했다. 나는 서울과 비토리아의 두 프로젝트 모두 논란과 토론을 일으키는 것이 의도된 것이라 보며, 무관심을 피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 본다. 디자이너로서 참여적인 프로젝트를 구상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어떻게 반응할지 예측하기는 어렵다. 어떤 면에서 이러한 건축은 대중을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하며, 디자이너의 통제력을 초월하는 바로 그 순간에 건축의 아름다움과 흥미로움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내 파빌리온을 멀리서 보면 그래피티가 뒤섞인 혼란스러운 조각처럼 보이고, 가장 크고 ‘시끄러운’—항상 가장 사려 깊은 건 아닌—것들이 눈에 띈다. 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로소 온갖 감수성이 깃든 수백, 수천 개의 작은 개입들을 진정으로 목격할 수 있다. 물리적인 벽이 당초 제안했던 바를 훨씬 넘어서는 사회적 대화를 촉발하는, 진정 감동적인 것들 말이다. 사회 전반에, 그리고 어쩌면 바스크 지방에는 특히 더 많은 벽이 존재한다. 좀처럼 허물기 어려운 사회적, 이념적, 문화적 장벽들이 산재해 있다. 때로는 이들을 극복한 것 같다가도 하룻밤 사이에 다시 솟아오르기도 한다. 이 파빌리온은 이러한 벽 중 일부를 가시화하는 데 일조했다. 비판적이고 순응하지 않는 시민 정신을 통해 벽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 벽을 드러내는 것이 우선이다.

〈Eu-topías, Ou-topías〉 전시 전경
▲ SPACE, 스페이스,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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