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공간)」 2026년 6월호 (통권 703호)

호리굴(2025)
예표
프로젝트를 시작해 물리적 실체로 완성되기까지, 프로젝트의 운명이 결정되는 초기의 두 순간은 건축주를, 대상지를 처음 마주하는 때일 것이다. 첫 대면에서는 대지를 선정해 구입까지하게 된 이야기를 주로 나눈다. 그 땅에 도달하기까지의 사연들은 긴 편이다. 저 멀리 오래된 가정사부터 자금을 마련할 때까지의 우여곡절로 시작해 긴 시간 꿈꿔왔던 개인적인 로망에 이르기까지 그 이야기를 듣다 보면, 건축가의 심상에는 모종의 이미지가 구축되기 마련이다. 그다음 건축가는 대상지를 방문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장소가 가진 인문적, 물리적 환경에서 단서를 찾아낸다. 미래에 들어설 건축의 형상(figure)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형태(form)가 단정 지어져 갇힌 결과물이라면, 형상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함축한 서사가 담겨 있는, 열린 장소로서의 몸체를 의미한다.

호리굴
이름 짓기, 약속
녹슨(NOXON, 2019), 미므미므(Mimmim, 2021, 「SPACE(공간)」 661호 참고), 논스페이스(NONSPACE, 2021, 「SPACE」 661호 참고), 겹겹집(Layer-Layered House, 2023), 호리굴(HORIGUL, 2025), 뜬곡(DDeun GoG, 2026), 5·3·2, 2·3·5(2023) 등. 초기작 녹슨에서부터 시작해 정웅식(온건축사사무소 대표)이 각 프로젝트에 지속적으로 부여해온 일련의 이름 붙이기는 어언 정웅식 건축의 정체성이 됐을 정도로 프로젝트와 한 몸이 되어버렸다. 이름, 한글과 영어의 철자 형식까지 포함해 이것이 곧 건축의 운명이 되어버린 셈인데, 그것이 프로젝트의 시작부터 부여됐는지 과정 혹은 완성 후에 붙여졌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건축물에 이름을 주거나 키워드를 제시하는 일은 건축가들이 늘상 해온 일이지만, 대개 그 표제들은 의미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전술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아 실체와의 괴리가 발생한다. 그러나 정웅식에게 이름은 첫 번째 약속 같은 것이어서, 지어질 건물의 모습을 이미 품고 있는 예표(prefiguration)이자 표음문자인 한글과 영어 이름이 표의문자로 전환되는 마술 같은 행위다. 건축의 정합성에 도달하기 위한 치열한 고민의 흔적이다.

5·3·2, 2·3·5(2023)
단서들, 서사의 씨앗
겹겹집은 녹슨을 연상시킨다. 주변 콘텍스트에 방어적인 동시에 공격적인 몸짓이 켜의 형식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그의 프로젝트에 고집스럽게 나타나는 DNA 같은 것이다. 한정된 대지 조건에 힘겹게 구축한 켜의 구성이 녹슨에서는 하나하나 불에 태워 구현한 탄화동판으로 정성스럽게 둘러져 있다면, 겹겹집에서는 싸리나무 노출콘크리트로 표현된다. 장소의 서사가 한 땀 한 땀 어렵게 구축되는 것임을 탄화동판과 싸리나무 콘크리트로 보여주고자 했을 것이다.
5·3·2, 2·3·5에서는 건물이 들어서기 전 대지에 오랫동안 새겨져 있던 논의 흔적을 끄집어낸다. 물리적으로는 연약하지만, 아마도 수백 년 동안 고집스럽게 장소에 남겨져 있었을 경작의 흔적을 지나치지 않고 집의 배치에 새겨 넣은 것이다. 평화롭고 진부하게 떨어지던 햇빛은 이제 체계화된 질서를 가르고 떨어지게 됐으며, 논두렁의 미세한 레벨 차이는 곧 겹으로 교차되는 거실들과 정원의 켜에 적용돼 드러난다. 호리굴에서는 어릴 적 기억에서 길어 올려진 이미지가 동네에 안착된다. 정자항 포구의 안쪽 높은 곳에서 수직으로 올라가며 연출하는 공간의 밀도는 육중하다. 마을에 내어줄 정원까지 고려한 1.2m 폭의 전면부는 다시 수직으로 이어지는 빛의 통로로 주효하게 사용되며, 반대편 깊숙이 자리한 내부 정원과 함께 비로소 성립되는 설정에서, 굴이어야 하고 호리호리할 수밖에 없는 건축을 제시한다.뜬곡의 단서는 대지 아래쪽 포구의 방파제로 형성된 좁은 길목에서 비롯된다. 다소 과장된 형태로 건물을 둘로 명확하게 가르는 두 개의 콘크리트 벽은 그 인위성으로 인하여 주변에 강한 균열을 만든다. 잘라내는 행위는 건축 이전, 과격하게 도로에 의해 잘려 남겨진 땅의 기억을 내포한다.

뜬곡(2026)
정원들, 필연적 풍경
정원은 그의 건축을 형상으로 지향하게 하는 중요한 인자 중 하나다. 정원이 프로젝트에 포함돼 전체에 얼마만큼 화학적 변화를 발생시키는지에 따라 그 필연성은 결정될 것이다.
겹겹집에서 사용된 겹에 놓인 정원은 신도시의 표정 없는 환경에 대한 비판적 몸짓인 동시에 안과 밖의 방어선에 위치하는 전략적 수단으로 기능한다. 5·3·2, 2·3·5에서는 땅의 켜 나눔을 극대화하여 읽히게 하는 텍스트의 역할을 하고, 주변의 수려한 자연을 멀리서 끌어들여 켜를 두텁게 만드는 적극적 주인공으로서 존재감을 과시한다.
뜬곡에서 물의 정원은 관조의 공간으로 제시되는데, 거실을 사이에 두고 저 멀리 있는 바다와 짝이 되어 켜를 완성한다. 가두어진 정원과 포구의 광경, 그리고 광활한 바다의 모습이 겹쳐져 강한 잔상으로 남는다.
반면, 호리굴에서 정원은 거친 벽의 모습으로 환원된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맞닥뜨리는 벽에는 물이 흘러 늘 젖어 있고, 식재된 화초들에 습기를 주는 물안개가 형성돼 있어 동굴의 습한 이미지를 직유한다. 그의 건축에 동원되는 정원 대부분은 인위적 공간으로 한정돼 있지만, 늘 주변 자연과 함께 거시적 경관으로 관계 맺는다. 정원에 대한 인식이 확장되는 지점이다. 여기서는 부분과 전체의 정합성이 중요하므로 건축가가 정원을 계획하고 식재와 구성에 직접 몸으로 개입해야만 하는 이유도 그 필연성에 기인한다. (후략)
▲ SPACE, 스페이스, 공간
ⓒ VMSPAC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