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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이 된 조각: 가브리엘 오로즈코 정원

글
신명진
자료제공
리움미술관
진행
방유경 기자

「SPACE(공간)」 2026년 6월호 (통권 703호)

 

리움미술관 야외 데크에 조성된 ‘가브리엘 오로즈코 정원’ 전경 ©Gabriel Orozco / Photo by Chung Heeseung 

 

 

리움미술관 야외 데크

2026. 4. 3. ~ 

 

 

현대미술을 공부하던 대학생 시절, 뉴욕현대미술관에서 멕시코 출신의 가브리엘 오로즈코의 회고전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느 오후에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맨 위층, 특별 전시관으로 올라갔다. 입구 옆의 안내문을 읽다가 발에 무언가 채이는 것을 느꼈다. 구겨진 신발 박스였다. ‘누가 미술관에 쓰레기를 버리고 간 거지?’ 속으로 한탄하며 박스를 한쪽에 치워놓고 전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에 발을 들이자마자 작품 설명이 눈에 띄였다. “가브리엘 오로즈코, ‘빈 신발 박스’ 1993년 작.” 당황스러움에 온갖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몸에는 소름이 돋았다. 작품과 쓰레기의 경계가 허물어진 아찔한 순간이었다.​

 

 

 

정원에 식재된 키작은 초화류와 지피류 ©Gabriel Orozco / Photo by Bang Yukyung 

 

플라자 10의 바닥면 중앙에 재현한 서울시 상수도 맨홀 덮개 ©Gabriel Orozco / Photo by Bang Yukyung 

 

 

관람의 공간에서 향유의 정원으로

미술관의 경험은 어디에서 시작하는가? 한때 소장품의 보고 혹은 무덤으로 칭해졌던 박물관과 미술관은 20세기 후반 건축과 야외 설치 작품을 통해 목적지이자 스펙터클로서 정체성을 획득했다. 리움미술관 또한 2004년 마리오 보타, 장 누벨, 렘 콜하스가 각각 설계한 세 건축물이 들어서면서 건축 전람회 같은 인상적인 경관을 갖게 되었다. 이에 더해 미술관 입구와 연결된 주차장 옥상의 야외 데크에는 알렉산더 칼더, 루이즈 부르주아, 아니쉬 카푸어 등 세계적 거장의 대형 조각 작품들이 차례로 설치됐다. 이 작품들은 지난 20여 년간 미술관 건축이 지닌 기념비적 속성을 강화하는 랜드마크이자 미술관이라는 비일상적 경험의 관문으로 작동했다. 그리고 야외 데크는 작품과 주변 환경의 조응을 위한 플랫폼이자 좌대의 역할을 수행했다. 주변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수직적인 조각 작품을 감상하려면 일정한 거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데크는 눈에 띄지 않는 ‘작품 감상의 배경’이 되었다. 

이 야외 데크를 정비해 올해 4월 문을 연 ‘가브리엘 오로즈코 정원’은 야외 조각 전시 공간이라는 기존의 기능을 넘어 공간의 활용성과 공공성이라는 가치를 강조한다. 미술관 관람에서 ‘미적 여정의 첫 단추’라는 역할을 그대로 유지하지만, 경험의 방식을 완전히 바꾸었다는 점에서 또한 주목할 만하다. 정원은 기존의 수직적 기념비 공간의 서사에서 벗어나 수평적 시선을 통해 소박함과 일상성을 경험하도록 인식의 전환을 이끈다. 무엇보다 관람객이 풍경 속에 능동적으로 개입하고 공간의 활성화에 함께 참여함으로써 공간적 전환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미적 경험의 새로운 시작점이자 전이 공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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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삼우 식재가 잘 드러난 플라자 5 ©Gabriel Orozco / Photo by Chung Heeseung 

 

 

장소특정적 설치 작품으로서 ‘정원’

가브리엘 오로즈코 정원은 리움미술관 최초의 정원 커미션 작업으로, 장소특정적 환경 설치 작품이자 수평적 조각이다. 오로즈코의 작업 목록에서 보면 사우스 런던 갤러리 정원(2016)과 멕시코시티의 차풀테펙 공원(2019~2025)에 이어 세 번째로 선보이는 정원-조각 작업이기도 하다. 그가 정원에서 형태를 만들고 공간을 구획하는 주된 요소는 ‘원’이다. 오로즈코의 작품에서 원이란 연속적 배열을 통해 역동성을 만들어가는 핵심적인 조형 언어로, 특히 도시환경과 일상의 맥락에서 움직임과 이동을 상징해왔다. 리움미술관의 정원에서도 역시 원의 형태가 두드러진다. 원은 수직적으로 중첩해 ‘벤치’가 되고, 수평적으로 연속해 ‘걷는 길’이 된다. 정원 진입부에서 시작되는 첫 번째 원(플라자 1)부터 마지막 원(플라자 10)까지 각 플라자의 중심과 그 주변으로 식재가 이루어져 방문자들은 편안한 눈높이에서 정원의 전체 구성을 조망할 수 있다.

낮은 언덕 형태로 조성된 식재 공간에는 수목과 관목, 지피류가 층을 이루며 다채로운 질감을 만들어내는 한편, 바닥의 포장석은 원의 형태를 강조하며 식재 공간 사이를 물 흐르듯 연결한다. 충청남도 보령에서 채석한 보령석을 원의 각도와 크기에 맞춰 가공해 섬세하게 시공했는데, 수면 위로 떨어진 물방울이 물결치며 둥글게 확산되는 듯한 패턴을 형상화했다. 포장석의 채도가 낮아 곳곳에 수풀이 난 계곡을 따라 물이 흐르는 듯한 느낌을 연출한다.

이 물길의 은유는 안쪽 깊숙이 위치한 플라자 10의 중심에 놓인 상수도 맨홀 덮개▼1에서 정점에 이른다. 서울시 상수도 맨홀을 그대로 재현한 이 요소는, 미술관이라는 공간적 맥락 속에서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를 가시화하는 하나의 장치다. 유머와 은유를 동시에 품은 이 맨홀 덮개는 발견된 오브제로서 1990년대의 도시환경을 그대로 머금었던 ‘유연한 돌’(1992)▼2과 같은 작가의 초기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정원 서측 전경 ©Gabriel Orozco / Photo by Chung Heeseung 

 

대나무로 둘러싸인 플라자 10 ©Gabriel Orozco / Photo by Chung Heeseung 

 

 

도시경관에 귀를 기울이기

야외 데크가 정원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데크 바닥에 사용된 자라목 또한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정원 아래, 미술관 진입로 벽면에 재활용된 목재는 데크 특유의 도톰한 질감을 살려 정원이 가진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보행로로 연장한다. 건축의 일부를 재활용해 ‘시간성’을 잉태하려는 미술관의 태도는 장소의 기억을 되살리며 정원, 진입부 데크, 보행로 사이의 경계를 새로운 공간으로 제시한다. 이에 더해 건물의 밀도가 높은 도심에 비움과 여유를 가시적으로 제공함으로써 미술관이 보다 공공적인 도시경관을 형성하게 한다.

이처럼 도시환경과의 교감은 오로즈코의 작업에서 작품의 형태와 의미를 구성하는 주된 기제다. 1993년 뉴욕현대미술관을 마주하는 건물 창문에 오렌지를 하나씩 놓았던 초기 설치 작업 ‘홈 런’은 작가가 도시에서 공공과 사적 공간의 경계를 작품으로서 재구성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공간에 내재된 경계를 가시화하여 일상을 비일상으로서 경험하도록 만든 것이다. 특히 스튜디오 작업을 배제하고 도시환경이 지닌 장소적 특정성을 작품으로 전환하는 그의 작품 세계는 다양한 협업을 통해 구체화된다. 제1회 광주비엔날레에서 지역 광고판 제작사와 협업해 ‘라이트 사인’ 시리즈(1995)를 제작한 것이 대표적이다. 사우스 런던 갤러리 정원에서는 건축사무소 6a 아키텍츠, 큐 가든 원예팀과 지속적으로 협업하며 영국다운 정원을 조성했다면, 이번 정원에서도 협업을 통해 한국적 분위기를 포집하고자 했다. 그가 한국에서 가장 인상적인 정원으로 조경가 정영선의 ‘희원’을 꼽은 것 역시 눈여겨볼 지점이다.조경에서 한국다움, 혹은 한국스러운 분위기는 특정 요소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식재, 시설, 환경적 조건을 통해 인공과 자연을 조율하는 감각적인 측면이 정원의 분위기에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포장석과 동선에 적용된 기하학적 모티프와 정원 후면부를 채우는 장 누벨의 건축 매스에도 불구하고 이 공간은 한국 정원의 정취를 자아내는데, 그 바탕에는 작가가 언급한 바와 같이 현장 시공을 담당한 국내 건축가, 조경가 등 전문가와의 협업▼3이 있다고 짐작된다.

일례로, 각 플라자와 주변 식재 공간에는 낮은 언덕을 조성해 식재에 필요한 토양(토심)을 보충한다. 정원 중간에 위치한 플라자에는 수목과 지피류를 중심으로 한 단순미가, 경계부 플라자에는 설유화와 같은 자생 초화류가 지피류 위로 드리우는 연출이 돋보인다. 정원을 둘러싼 대나무는 간격을 두고 심겨 펜스 뒤편 도시경관을 완전히 차단하지 않으면서도 녹색의 막을 형성한다. 이처럼 균형 잡힌 식재 기법은 식물과 시설, 도시환경과 정원 사이를 메우는 정밀하게 설계된 지형적 흐름과 녹음의 층위를 만든다. 이는 기존 지형과 자연 조건을 강조하는 한국 정원과 맥락적 연결고리를 만들어낸다. 

 

 

 

가브리엘 오로즈코의 평면 스케치

 

리움미술관 진입로. 기존 야외 데크 목재를 재활용해 마감된 벽면 위로는 가브리엘 오로즈코 정원이, 아래로는 주차장이 자리한다. Photo by Bang Yukyung 

 

 

세한삼우가 빚는 겨울 경관

주차장 옥상에 자리한 가브리엘 오로즈코 정원 안에 들어서면 그 아래 거대한 공동(空洞)이 존재한다는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 도로와 마주하고 있는 경계부를 둘러싼 대나무가 위요감을 형성하는 한편, 소나무와 매화나무가 각 플라자에서 솟아올라 바닥을 ‘땅’으로 인식하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우리가 도시 속에서 “땅의 공간을 만들어내야 한다”며 정원이 “자연과의 친밀감”을 선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인공 환경을 조성하는 도시의 구조상 이 친밀감은 결국 정원의 물질성과 은유를 통해 매개되는 자연의 감각에 달려 있는데, 그 감각의 원천은 정원의 식재 개념인 ‘세한삼우(歲寒三友)’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세한삼우는 겨울 추위 속에서도 푸름을 유지하고 꽃을 피우는 대나무, 소나무, 매화나무를 뜻한다. 유교에서는 전통적으로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며 예로부터 그림이나 시의 소재가 되었다. 이러한 은유를 강조하기 위해 겨울 이미지에 맞춰 절제된 색상 팔레트의 초화류를 식재했다. 흰 꽃이 피는 백당나무, 설유화, 찔레나무, 운남소국, 물매화가 각 플라자에 자리 잡으며 ‘세한’이라는 겨울의 한 장면을 연출한다. 흰색으로 피어나는 언덕 사이 꼿꼿하게 자라난 듯한 수목의 모습은 한여름에도 눈 내린 계곡의 풍경을 상상하게 한다.

 

​공공 정원, 미술관의 앞마당

협업을 통해 장르의 벽을 허물고 외연을 확장해가는 현대 미술관의 흐름을 고려할 때, 가브리엘 오로즈코 정원은 새로운 형태의 예술을 소개하는 도전의 연장선에 위치한다. 무엇보다 일상(도시)과 비일상(미술관)의 경계를 활성화하는 전이 공간으로서 ‘공공 정원’의 형태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관람객과 대중에게는 활용도가 낮았던 데크가 정원으로 바뀌어 미술관 공간이 확장됐다고 느껴질 것이다. 미술관 전면에 위치해 퍼포먼스나 참여미술의 무대가 될 가능성 또한 농후하다. 많은 미술관과 박물관이 전통적으로 전면부 플라자를 활용해 공공성을 발전시켜왔듯, 이번 정원 개원이 미술관과 관람객, 도시환경을 비롯한 공공과의 관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기대해보자.

 

 

 

​정원에서 리움미술관을 바라본 모습 ©Gabriel Orozco / Photo by Bang Yuky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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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로즈코는 이번 정원 작업을 위해 서울을 돌아다니다가 상수도 맨홀 덮개를 발견하고, 자신이 만들려던 정원의 ‘물’과 ‘원’에 대한 은유를 그대로 보여주는 상징물처럼 다가왔다고 한다. 실제 맨홀을 그대로 본떠 만든 뒤 플라자 10의 중앙에 설치했기 때문에, 진짜 맨홀로 혼동하는 관람객들이 있었다.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지우는 그의 작업 특징을 보여주는 ‘발견된 오브제’라 할 수 있다. 

2 ‘유연한 돌’은 가브리엘 오로즈코의 삶과 작품 세계를 함축한 초기 퍼포먼스 작업이다. 작가는 자신의 체중인 62kg과 동일한 무게의 공작용 점토로 만든 공을 맨해튼 거리에 굴린 뒤, 때묻고 형태가 일그러진 공의 모습을 촬영해 전시했다. 멕시코에서 태어난 그는 고정된 작업실 없이 여러 도시에서 거주하며 작업하는데, 전 세계를 이동하며 활동하면서 재료를 옮기는 대신 각 도시에서 발견된 오브제를 통해 창작하는 것을 선호한다. ‘유연한 돌’은 관객에게 몸과 조각의 은유를 통해 현실과 이동의 관계를 보여주고, 세상과 자신이 맺는 관계를 이야기한다.

​3 조경가 조혜령과 그람디자인이 설계와 시공을, 온도프로젝트 건축사사무소의 김자경 대표와 강승연이 건축 및 벤치 설계를 맡았다.   

 

 

 

 

월간 「SPACE(공간)」 703호(2026년 06월호) 지면에서 더 많은 자료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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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진
신명진은 뉴욕대학교에서 미술사를,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조경학을 전공한 도시 연구자다. 현재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재직하며 조경, 예술, 도시의 접점을 다방면에서 살피고 있다. 최근에는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의 기록을 담은 『공원의 탄생』을 편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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