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공간)」 2026년 7월호 (통권 704호)

메덩골 현대정원 일부 모형 사진. Image courtesy of Pezo von Ellrichshausen
기하학은 건축의 근원적 언어다. 비트루비우스는 인간의 신체에 담긴 우주적 비례를 원과 사각형의 조합으로 설명하였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 이면에 자리한 수학적 비례의 세계를 추구했던 피타고라스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피타고라스와 교감이라도 나눈 듯, 동양에서도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는 상징체계가 존재하였다. 하지만 계몽주의 이후 기하학은 그 성격이 바뀐다. 상징성보다는 합리적 생산과 제어의 도구로 변질된다. 사각과 원을 다양한 크기로 확대하거나 축소한다. 주축과 부축을 설정하여 기하학적 형태들을 가지런히 배치한다. 극소와 극대의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기도 한다. 알고리즘의 규칙성과 개별적 차이를 함께 묶어내는 현대의 파라메트릭 모델링은 ‘대량맞춤’이라는 새로운 생산 패러다임을 열었다. 기하학은 이제 대지, 신체, 공동체, 관습, 의례, 역사와 무관한 저항 없는 생산을 지원하는 도구로 탈바꿈한다. 재현 불가능한 일상의 세계―후설이나 메를로퐁티가 생활세계(lived world)라고 부르던 것이다―를 제어 가능한 추상적 모델로 환원해준다. 추상적 재현이 구체적 세계를 대체한다. 형식적 차이의 끝없는 증식은 의미를 잠식한다. ‘생산의 시대’는 이렇게 당도하였다.
생산의 시대에 페소 본 에릭사우센의 작품은 기하학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이들의 작품은 원과 정사각형 같은 기본적인 기하학적 형상에서 출발한다. 장소를 불문하고 생산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기하학이 아니다. 이들의 기하학은 현대건축이 제거해온 지면과의 긴장감, 습하고 그늘진 하부, 중력의 감각, 그리고 하늘로 솟아오르는 부유감을 다시 호출한다. 풍토와 풍화를 용인하며 꼿꼿이 서 있다. 세계로부터 독립된 객체가 아니라 대지와의 교감 속에서 ‘의미’를 획득한다. 경사진 길을 오르내리며 균형을 잡고, 어디로 걸어갈지 지향점을 찾고, 그늘을 찾아 나서거나 반대로 환하게 열린 광명의 공간을 찾아 나서는 신체를 잊지 않는다. 전반성적(前反省的) 지각을 통해 소통하는 체화된 존재로 인간을 응대한다. 무엇보다도 페소 본 에릭사우센의 기하학은 오리엔테이션(orientation)의 장치이다. 공간과 시간 속에, 즉 풍토와 역사 속에 인간을 다시 위치시킨다. ‘나는 어디에 그리고 어느 시대에 서 있는가?’라는 근원적인 감각을 소환한다. 추상과 구체, 재현과 체험, 대상과 세계 사이에 벌어진 틈새를 다시 연결하는 근원적인 몸짓이자, 인간이 세계 속에서 다시 위치를 찾도록 돕는 정향의 기하학이다.

위버하우스(2025) 모형 사진. Image courtesy of Pezo von Ellrichshausen
선비의 갓(2025)은 둔덕 위에 자리한 원의 형상을 한 자그마한 파빌리온이다. 얇은 원형 기둥 네 개가 원형 지붕을 지탱한다. 가운데 부분도 원형의 형태로 파여 있다. 걸터앉아 정원을 조망하도록 유도하는 외향적인 파빌리온이다. 거북선(2025)은 원과 삼각형을 조합하였다. 높다란 곡면 벽에 난 구멍을 통해 내부로 진입하면 요새 같은 옥외극장이 나타난다. 정원의 풍경이 사라지고 하늘만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곧 반전이 일어난다. 옥외극장을 가르고 난 단을 따라 오르다 보면 정원의 풍경이 다시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벽의 상단에 어깨를 걸치고 지그시 내려다보며 한가롭게 정원을 조망할 수 있다. 뚜껑이 없는 동굴이지만 동시에 정원의 조망을 극적으로 제공하는 열린 파빌리온이다. 내향과 외향, 중심과 주변, 하늘과 땅이 조우한다. 이데아(2026)는 정사각형과 원을 조합하였다. 경사진 대지를 따라 바닥을 정사각형으로 정리하고 그 내부에 원형의 계단식 수공간을 삽입하였다. 한 변에 열 개씩, 총 백 개 기둥이 격자틀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있다. 반복되는 기둥의 배열은 자연스럽게 무한의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거울처럼 빛을 반사하는 스테인리스 스틸 마감은 이러한 무한의 감각을 더욱 증폭시킨다. 여정(2025)은 무수한 동심원을 따라 대리석을 정교하게 잘라 배치한 옥외극장이다. 동서남북 네 축을 따라 진입로를 설정하였다. 정중앙에는 거울이 숨겨진 동그란 우물이 자리한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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