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공간)」 2023년 7월호(통권 668호)
지난 4월 4일, 서울시립미술관이 종로구 평창동에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SeMA AA)를 개관했다. 2014년부터 건립 준비를 시작해 약 10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SeMA AA는 현대미술의 중요 자료를 수집, 보존, 연구, 전시하는 국공립 최초의 아카이브 전문 미술관이다. 아카이브를 필두로 도서관, 기록관, 미술관의 기능을 복합적으로 수행하는 SeMA AA는 연구자를 위한 기관을 넘어 시민에게 예술을 이해하는 새로운 틀을 제공하는 장소로 자리매김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SeMA AA의 설립 배경과 건축·공간의 구축 과정을 각각 정유진(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과 과장), 김성한(건축사사무소 아크바디 대표), 이희원·정은주(건축사사무소 오드투에이 공동대표)와의 인터뷰를 통해 들어보았다.
① 기록으로부터 예술을 향해
인터뷰 정유진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과 과장 × 김지아 기자
김지아: SeMA AA는 아카이브에 특화된 서울시립미술관의 분관이다. 기관의 설립 배경이 궁금하다.
정유진: SeMA AA가 자리한 평창동 일대는 소규모 갤러리와 미술관이 밀집해 있고, 다수의 문화예술계 종사자가 거주한다. 사업이 처음 추진되던 2014년 당시에는 아카이브라는 뚜렷한 정체성을 내세우기에 앞서 ‘평창동 미술복합문화공간’이라는 사업명을 따라 지역에 기반한 복합문화공간 정도의 개념만 있었다. 이후 운영 주체로 서울시립미술관이 선정되면서 구체적인 기능을 고민한 끝에 작품이 탄생하는 과정상의 산출물이 되는 자료, 즉 미술사를 뒷받침할 수 있는 여러 형태의 자료를 수집하는 기관으로 분관의 성격을 구체화했다. 본관의 수집 대상은 작품에 한하므로 자료를 수집하는 기능은 사실상 미흡하다. 이번 SeMA AA 설립을 계기로 조례를 개정해 작품뿐 아니라 자료 역시 적극적으로 수집하고 관리할 수 있도록 했다. 이에 더해 2000년대에 이르러 기록학계와 미술계에서 아카이브에 대한 관심이 지속적으로 높아지는 현상도 영향을 미쳤다. 논의에 비해 실제 미술을 다루는 아카이브를 구축한 국내 사례는 드물었기 때문이다.
김지아: SeMA AA에서 수집 대상으로 삼는 자료의 범위와 수집 기준은 무엇인가?
정유진: 1950년대 이후 한국 현대미술의 창작과 매개 활동 자료를 대상으로 컬렉션을 수집하고 있다. 현재로서는 1970~1980년대 아카이브를 중점적으로 구축한 상황이다. 창작 과정에서 산출된 대부분의 자료를 아카이브라는 이름으로 자료화할 수 있다. 그중 미술사적으로 연구 가치를 지니는 자료가 수집 대상이 된다. 대표적인 형태로 작가 노트, 스케치, 드로잉, 모형을 비롯해 영상과 사진 등이 포함된다.
'명랑 학문, 유쾌한 지식, 즐거운 앎' 전시 자료 ⓒ전명은
김지아: SeMA AA는 자료를 수집, 보존, 연구하는 기능뿐 아니라 전시와 교육 프로그램을 아우른다. SeMA AA가 목표로 하는 역할과 정체성은 무엇인가?
정유진: 소위 아카이브 하면 접근이 제한된 자료를 조심스럽게 열람하는 장면을 떠올린다. 그 또한 아카이브 기관의 중요한 역할이지만, 실제 자료를 열람하는 대상은 주로 연구자일 것으로 생각했다. SeMA AA는 아카이빙을 주력으로 하는 기관이지만, 연구자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과 학생, 전문가 등 다양한 사용자와 관계 맺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 연장선에서 전시와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수집한 아카이브를 토대로 연구를 진행하고 전시를 기획해 관람객과 소통하고, 연계 프로그램을 통해 다양한 층위에서 다시금 아카이브를 활용하고 소비하는 방식을 그렸다.
김지아: 대지면적 7900㎡, 연면적 5590㎡에 달하는 SeMA AA는 주요 기능에 따라 모음동, 배움동, 나눔동의 세 개 동으로 구성됐다. 구체적으로 이들이 어떻게 작동하는가?
정유진: 2017년 설계공모에서 당선한 김성한은 ‘탈중심적인 수평 차원의 다원적 미술 복합문화공간’을 콘셉트로 네 개의 분절된 필지를 활용해 각기 다른 기능을 가진 세 개 동을 계획했다. 그중 가장 큰 규모의 모음동은 기관의 핵심 기능인 아카이브의 보존과 연구, 전시를 담당한다. 방문객을 맞는 1층에는 라운지와 레퍼런스 라이브러리, 두 개의 전시 공간이 자리하는데 열린 공간으로 계획된 것이 특징이다. 특별한 목적 없이 방문하더라도 도서를 열람하거나 전시를 관람하는 등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다. 2층부터 4층까지는 일반인의 접근이 제한된 보존 서고가 놓였다. 이곳에서 자료 수집과 보존, 연구 등이 이루어진다. 3층에 마련된 리서치랩은 한 단계 높은 보안을 요하는 자료를 열람하는 공간으로, 사전 예약제로 운영된다. 지형을 따라 이어지는 옥상은 야외 전시 공간이자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다. 모음동 동편에 자리한 배움동은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수용한다. 경사지의 특성을 살려 조성된 계단식 공간과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과 배움 활동이 이루어지는 모두의 교실이 있다. 두 동의 건너편에 위치한 나눔동은 홍제천을 마주해 1층에는 카페, 2층에는 학술 행사와 공연 등 공공 프로그램이 열리는 다목적홀이 자리한다. 이렇듯 규모가 큰 미술관은 아니지만 다양한 기능을 가진 각 동이 각자의 자리에서 따로 또 같이 상호작용하는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모음동 1층 레퍼런스 라이브러리 ⓒ노기훈
김: SeMA AA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건축가에게 구체적으로 요구한 사항은 무엇인가?
정유진: 공모로 진행된 설계인 만큼 전반적인 디자인은 건축가의 콘셉트를 따르되, 공간 운영 측면에서 미술관의 세부 기능을 매끄럽게 수행하는 방향으로 의견을 더했다. 진행 과정에서 공사비가 예산을 초과해 계획했던 사항을 온전히 구현하지 못할 뻔했는데, 운영부서에서 예산을 추가로 마련해 인테리어 설계를 별도로 발주했다. 시민을 대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새로운 유형의 공공기관인 만큼 섬세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더욱이 아카이브 기관의 특성상 진입장벽이 높을 것으로 예상돼 보안을 요하는 보존서고 등 일부 공간을 제외하고는 편안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중점을 뒀다. 대표적으로 1층 라운지와 레퍼런스 라이브러리는 일반적인 도서관처럼 정숙한 분위기를 연출하기보다 자유롭게 휴식을 취하는 공간을 목표로 했다. 공간에 먼저 익숙해져야 아카이브에 대한 인식도 유연해질 거란 생각에서였다.
김지아: 물리적 공간을 조성함과 동시에 디지털 미술아카이브를 구축했다. 디지털 미술아카이브만의 차별점은 무엇인가?
정유진: 자료가 수집되면 1차 정리를 한 후 보존서고에 보관하는 형태를 취하는데, 그 과정에서 데이터베이스(DB)를 구축해 디지털화하는 작업을 거친다. 대부분의 기관이 자체적으로 DB 구축은 하지만, 디지털 미술아카이브처럼 원본(실물) 이미지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소장 중인 자료의 목록뿐 아니라, 개개 자료를 열람할 수 있도록 공개해 직접 기관을 방문하지 않고도 온라인으로 아카이브를 활용할 수 있게 했다.
'명랑 학문, 유쾌한 지식, 즐거운 앎' 전시 전경 ⓒ전명은
김지아: 국공립 최초의 아카이브 전문 미술관인 만큼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앞으로의 목표는 무엇인가?
정유진: 다양한 기능을 가진 미술관이지만, 미술아카이브라는 정체성이 주축이 되는 기관이기에 좋은 자료를 많이 수집하는 게 급선무다. 개관 전까지는 되도록 다양한 장르, 사조, 시대, 주체의 자료를 포괄적으로 수집하려고 노력했다면, 앞으로는 본격적으로 방향성을 가지고 아카이브를 구축해 자료의 매력으로 기관을 방문하게 하는 기반을 마련할 계획이다. 이를 토대로 전시, 교육 등으로 활용 방식을 다각화해 일반 관람객과 접점을 늘리는 일 또한 주요 과제다. 미술에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예술 경험이 이루어질 수 있는 장소를 목표 삼고 있다. 아카이브라는 자료 자체가 독특한 예술 경험의 출발점이 되어주기도 한다. 일반적인 작품 감상의 틀을 벗어나 자연스럽게 책을 읽고 전시를 보며 범접하기 힘든 작품의 개념이 아닌, 작가가 친근하게 끄적였던 메모 옆에서 나란히 무언가를 끄적이는 일도 예술 경험이 될 수 있다. 이를 지향점 삼아 한 축에서는 전문가에게 소구하는 기반을 마련하고 다른 한 축에서는 지역에 기반해 다채로운 문화 서비스를 제공하는 장소로 자리매김하고자 한다.
② 지형을 따라 열린 미술관
인터뷰 김성한 건축사사무소 아크바디 대표, 이희원, 정은주 건축사사무소 오드투에이 공동대표 x 김지아 기자
김지아: SeMA AA의 건축은 2017년 평창동 미술복합문화공간 국제설계공모를 거쳐 진행됐다. 네 개의 분리된 부지를 활용해 아카이브, 도서관, 미술관의 기능을 담는 것이 주요 과제였다. 이를 어떻게 해석했나?
김성한: 대지가 위치한 평창동의 도시 조직은 1970년대 주택단지 조성을 위해 계획된 필지들이 작은 규모로 분절된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큰 규모의 땅에 해당하는 현재 모음동의 부지를 비롯해 따로 떨어져 있는 나머지 세 개 대지를 활용하는 조건이었는데, 수장, 연구, 전시, 교육 등 기능을 각각 독립적으로 배치하는 설계안을 제안했다. 각기 다른 기능을 복합하기보다 개별 기능이 각자의 자리에서 작동하는 게 평창동 도시 조직에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물리적으로는 분리되어 있어도 운영 프로그램에 따라 각 동 간의 연계가 만들어질 것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콘셉트를 토대로 모음동의 경우 경사지의 지형을 살려 하나의 건물이지만 작은 스케일로 매스를 분절했다. 설계 공모안에서는 네 개 필지 중 한 곳에 연구 기능만 수행하는 단독 건물을 설계했는데, 운영 주체의 의견을 반영해 모음동으로 기능을 모았다. 그 과정에서 한 개 층이 추가돼 볼륨의 변화가 있었다. 더 자연스럽게 땅에 걸친 건축의 형태였으나 층을 더함으로써 기존 계획안에서보다는 도로 레벨에서 높이가 높아졌다. 배움동과 나눔동은 필지 규모에 맞게 각각 교육과 커뮤니티 프로그램을 수용하는 공간으로 계획했다.
모음동 1층
김지아: 모음동 1층은 자료 열람, 전시 관람 등 여러 기능이 공존한다. 큰 규모의 공간이 별도의 구획 없이 계획됐는데, 설계 시 주요하게 고려한 점은 무엇인가?
김성한: 설계에 있어 무엇보다 SeMA AA가 새로운 유형의 기관이라는 점을 고려했다. 일반적인 미술관과 달리 전시 공간에 방점을 두기보다 SeMA AA가 지닌 다양한 기능을 중심으로 기관의 정체성을 공간적으로 보여주는 데 집중했다. 모음동 1층은 복도 없는 열린 공간으로 계획했다. 리셉션, 라운지, 라이브러리, 전시실의 기능을 모두 담고 있다. 보안이 필요한 3~4층 보존서고 및 리서치랩 등 영역과 달리 개방성이 중요한 공간이기에 자연 채광과 층고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도로 쪽 입면은 전면 유리로 열려 있는데, 이는 채광 확보와 더불어 개방성과 투명성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다. 언뜻 이름만으로 성격이 쉽게 읽히지 않는 기관이기에 밖에서 볼 때 어떤 활동이 이루어지는지 한눈에 보여주고자 했다.
모음동 1층 ⓒ노기훈
김지아: 다양한 기능을 수용하는 만큼 공간 구획과 동선 계획이 중요한 과제였을 것 같다.
이희원: 운영부서가 확정되고 공간의 활용 방안이 구체화되면서 인테리어 설계를 통해 내부 요소를 조율해나갔다. 1층의 바닥 마감은 디자인 콘셉트를 살려 모두 통일하고, 비어 있던 라운지 공간(현 레퍼런스 라이브러리)에 기능을 부여하고 가구를 배치하는 식으로 구획을 시도했다. 또한 리셉션과 그에 면한 전시실 간 애매했던 경계를 벽체 오프닝과 천장의 높낮이, 두께, 재료 등을 다르게 사용해 벽과 천장으로 구분지었다. 바닥과 천장, 벽면의 색감과 재질은 비슷해 보이지만 미세한 변주를 주어 한 공간 안에서도 다채로운 공간감을 경험할 수 있게 했다.
모음동 1층 ⓒ노기훈
김지아: 미술관이자 도서관으로 기능하는 SeMA AA에서 빛은 공간을 구성하는 중요 요소 중 하나다. 전면 유리 커튼월로 자연광을 들여왔는데, 이를 극대화하는 조명 설계 방법은 무엇이었나?
정은주: 건축설계안의 외부 창호 시스템과 설비 시스템을 고려해 천장과 조명 설계를 진행했다. 미술관이 비일상적인 공간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천장고를 조금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유리 벽을 통해 드는 자연광과 인공광이 심리적으로 연결되면서 확장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 끝에 그리드 루버를 천장 재료로 활용해 그 안으로 광원을 매입했다. 광원과 루버를 중첩해 재료의 물성과 빛이 겹쳐져 빛을 세부적으로 여과시키는 효과를 꾀했다. 이는 은은하고 오묘한 실내 분위기를 조성하고, 공간의 높낮이나 움직임에 따라 빛과 그림자가 반사되고 투과되어 역동적인 분위기를 느끼도록 한다.
김지아: 중성적인 공간과 어우러지는 가구 디자인도 눈에 띈다.
정은주: 운영부서와 논의하며 흔히 공공기관에서 볼 법한 가구 대신 조금은 자유롭고 독특한, 그래서 아직은 낯선 SeMA AA라는 공간에 흥미를 유발하고, 여지를 주는 유연한 가구 디자인을 떠올렸다. SeMA AA에 배치된 가구는 모두 플랏엠이 디자인했다. 공간별로 사용 방식과 인원 등을 조율해 디자이너에게 전달했고, 세부적인 재료와 색감 등은 디자이너가 결정했다. 가구가 오브제라면 공간은 배경이 되도록 의도했다. 다양한 프로그램과 작품이 주기적으로 업데이트되는 미술관의 특성을 반영해 중성적이고 유연한 공간을 계획했다.
모음동 3층 리서치랩
모음동 3층 보존서고
김지아: 지형에 따라 내부 공간과 적극적으로 관계 맺는 옥상정원을 설계했다.
김성한: 평창동은 자연환경과 경관이 우수한 데 비해 소규모 나대지들을 제외하고는 오픈스페이스가 거의 없다. 간혹 소공원이 있기도 하지만 경사지가 많아 공공이 활용할 수 있는 수평적인 마당은 없는 상황이다. 이에 경사를 활용해 매스를 분절하면서 층마다 옥상에 공원을 만들었다. 내부 공간도 중요하지만 외부와 소통하며 지역과 관계 맺는 제스처 또한 공공건물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봤다. 야외 공간은 전시 공간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관람객뿐 아니라 일반 시민이 쉬어갈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된다.
배움동 1~2층 ⓒ노기훈
배움동 2층 모두의 교실 ⓒ노기훈
옥상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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