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와 기억
‘기억한다는 것’은 그 장소에 대해서 상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지워진 글씨 위에 다시 덧쓴 오래된 양피지 문서 같은 ‘장소’ 안에서, 주체성은 개체를 존재로 구축하고 ‘현존재’가 되게 하는 결핍과 연결된다.
- 미셸 드 세르토, 『일상생활의 실천』
세르토에 의하면 ‘장소’에 대한 인식 형성에서는, 여기에는 있고 저기에는 없다는 분류적 비교 상상과 반복적 경험을 통해 개인의 주체적 공간 구조를 형성하는 단계가 필요하다. 유아 시절의 장소적 체험은 이후 성인 시기의 일상으로 확장되어 도시 안에서 개인의 창조적 은유 공간을 작동하는 주요 기제가 된다고 그는 설명한다. 세르토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유아기의 일상적 공간 경험이 이후 인지적 사고 능력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데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구립 맑은샘 어린이집(이하 맑은샘 어린이집)의 공간 조직은 아이들의 공간 지각 스케일에서 시작한다. 어른보다 공간을 훨씬 크게 느낄 아이들의 인지적 안정감을 위해, 건축가는 건물을 네 개의 박공 매스와 기단부 등 다섯 개의 작은 단위로 분할한다. 지층에서 반 외부인 놀이터와 함께 형성된 기단부는 상부 매스들의 높이가 낮아 보이게 하는 착시 효과에 기여한다. 설계공모 시 발주처에서 요구한 1, 2층 어린이집과 3층의 복지지원센터는 이질적인 성격의 프로그램이다. 이용자와 운영자가 다르고, 공간적 특성과 사용 양식이 상이해서 한 건물에 공존하기에는 충돌 요소가 많다. 건축가는 이러한 이질적인 두 프로그램을 형태적으로 구분하여 계획하는 대신, 진출입 동선만 분리하고 동일한 형태의 물리적 그릇 안에 층별로 담아내는 태도를 취했다. 기존의 건축가들과는 다른 태도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근대 이후 보편적 선언이 이 어린이집에서는 아이들을 위한 건물 스케일에 우선적 가치를 내주었다. 형식이 내용을 선도하는 사례를 보여주는 것이다.

건물은 네 개의 박공 매스와 기단부 등 다섯 개의 작은 단위로 분할됐다.
공간은 어떻게 아이들의 기억이 될까?
맑은샘 어린이집의 공간구성은 유연하면서도 치밀하다. 북측에는 부속실을 배치하고 주요 실들은 남측으로 최장 면을 확보한다. 두 개의 보육실이 하나의 유아 화장실을 공유하는 조닝, 이동과 놀이를 겸하는 중앙 계단실은 외부의 정원과 함께 프로젝트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다. 건축가는 건물 주 출입구의 반 외부 놀이터 공간, 상부의 빛이 들어오는 계단, 복지센터 주 출입 부분의 작은 정원을 세 개의 정원으로 언급한다. 아이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보육실의 반복 구성 안에서 이 세 정원은 유아의 창조적 활동을 허락해주는 주요한 변이 공간이다.
유아들이 등원하면서 처음 만나게 되는 공간은 지붕은 있지만 하늘에서 동그란 빛들이 들어오는 나무 정원이자 모래가 있는 외부 놀이터다. 어느 아이는 이곳을 모래놀이터라고 하고 어느 아이는 숲이라고 불렀다. 또 어느 아이는 이곳을 물놀이터라고도 했고 어느 아이는 엄마랑 헤어지고 만나는 곳이라고도 한다. 어른들 눈에 쉽게 띄지 않는 온갖 장치와 작은 기구들의 이름으로 아이들은 이곳을 명명한다. 모든 보육실은 경계가 투명하다. 아이들은 눈높이에 맞는 크고 작은 창문으로 도시를 볼 수 있다. 화장실과의 경계에도 빛이 들어오고, 복도와 면한 문도 커다란 유리문이다. 아이들은 이 유리문 위에 그림을 그리고 세면대 너머로 교실 선생님의 모습을 훔쳐본다. 눈높이에 있는 창을 통해 지나가는 차바퀴의 모양에 대한 토론 수업을 하기도 한다. 통상적인 보육실 벽의 내향적이고 계획된 학습 게시판 대신 이곳 보육실 공간의 모든 투명한 경계는 유연한 학습 재료판이 된다.
보육실 복도 밖은 또 다른 세상이다. 중앙 계단실 천창에서 들어오는 빛은 복도를 은은하게 비추고, 아이들은 계단을 한 단 한 단 올라가며 옆의 스크린 그물망에 손을 끼워보기도, 좋아하는 장난감을 걸어보기도 한다. 몸으로 하는 상상 속에서 아이들의 공간 문맥은 더욱 공고해진다. 무엇보다도 중앙 계단을 올라가다 보면 좌, 우, 전면에서 다양한 수직 높이로 다른 교실을 엿볼 수 있다. 보육실 안 아이들은 계단 위 친구의 양말을 보며 창문 너머 계단 정원을 상상한다. 계단의 맨 상부에서는 고개를 조금만 들면 커다란 천창의 하늘과 3층 복지센터의 복도, 외부 테라스 정원이 보인다. 2층 보육실에 위치한 ‘여기’라는 장소 개념은 위층 ‘저기’의 시각적 확인으로 더욱 확연해진다. 아이들이 보내는 일상은 조금씩 다른 주체적 행위의 반복으로 그들의 장소 기억이 된다.

이곳 보육실 공간의 모든 투명한 경계는 유연한 학습 재료판이 된다.

중앙 계단실 천창에서 들어오는 빛은 복도를 은은하게 비추고, 아이들은 계단을 한 단 한 단 올라가며 옆의 스크린 그물망에 손을 끼워보기도 한다.
그 많던 집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맑은샘 어린이집이 자리 잡은 옥수동은 원래 다세대・다가구 건물이 밀집해 있던 저층 주거지였다. 급한 경사 언덕 위에 2~3층 건물들이 옹기종기 단을 이루며 줄 서 있던 마을의 모습은 사라졌고 넓은 도로에 세련된 고층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어린이집 부지는 이전의 산동네를 전면 철거하고 재개발한 새로운 아파트 블록에 신규로 조성된 코너에 있다. 널찍한 가로의 경계를 따라 아파트 잔디 조경의 열린 경관을 보며 걷다 보면 돌연 맑은샘 어린이집을 만나게 된다. 박공지붕을 가진 네 개의 매스가 마치 2층 건물들인 양 서로 맞물려 모여 있는 모습에는 지금은 사라진 옛 동네의 모습이 담겨 있다. 물론 옛 동네에 대한 상징은 작가의 의도가 아니었으며, 또한 4년 전 옛 동네 모습을 기억하는 아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전에는 있고 지금은 없는 주택 건물들이, 예전엔 없고 지금은 있는 고층 아파트를 배경으로, 지금 이곳에서 어린이집으로 기호화되어 나타나는 흥미로운 상황 안에서, 아이들은 작은 스케일의 어린이집을 높은 아파트 스케일의 집과 구분하는 상상 반복의 기억 과정에 돌입하게 됐다. 성인이 된 아이들의 인식 속에 작은 박공집은 보육기관과 같은 사회적 공간으로, 크고 높은 건물은 집같이 개인적 공간으로 기억되는 도시 구조를 가지게 될지도 모르겠다.
기억 그리고 장소
아이들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체험하게 되는 사회적 공간으로서의 맑은샘 어린이집은, 몸으로 체득하는 개별화된 상상력을 허용하는 다의적 장소로 많은 가능성을 보여준다. 또한 아이들의 이전 기억이나 건축가의 의도와는 별개로 서울 옥수동이라는 도시의 서사 안에서 생겨난 대지의 특성과 건물의 형태적 언어는 기성세대에게 기호적 상징 의미를, 새로운 세대에게는 상상 속의 새로운 도시 체계를 구축하게 해준다. <진행 이성제 기자>


어린이집 부지는 이전의 산동네를 전면 철거하고 재개발한 새로운 아파트 블록에 신규로 조성된 코너에 있다.

▲ SPACE, 스페이스, 공간
ⓒ VMSPAC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다니엘바예건축(다니엘 바예)
이레네 바라, 이선민, 피예준, 노소정, 하비엘 찬 포라스, 야고 블랑코
서울시 성동구 옥수동 528-2
노유자시설(어린이집)
501.7m2
275.28m2
800.34m2
지상 3층, 지하 1층
4대
11.8m
54.87%
148.73%
철근콘크리트조
미장벽돌, 외단열시스템, 징크
석고미장 위 도장, 흡음패널, EQ 플로어, 타일
(주)진원구조엔지니어링
(주)주성이엔지
한길엔지니어링
가복종합건설(주)
2017. 1. ~ 6.
2017. 9. ~ 2018. 5.
성동구
(주)정민지오테크
자인건축사사무소(정대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