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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된 경사지의 자생적 지속가능성: 경리계단길

요앞 건축사사무소

글
류인근, 김도란, 정상경
사진
류인근
자료제공
요앞 건축사사무소
진행
김정은 편집장
background

「SPACE(공간)」 2024년 9월호 (통권 682호) 

 

 

차가 닿지 않는 좁은 골목길에 위치한 땅, 경사지에 있는 땅, 인접한 건물이 경계를 침범해 있는 땅, 폭이 좁고 면적이 작으며 일조량이 적은 땅. 경리계단길의 대지는 이 모든 악조건을 가진 땅이었다. 이러한 난제 속, ‘길’의 의미에 집중해서 건축물의 가치를 끌어올리고자 했다. 

 

이태원의 골목길

대지의 위치는 경리단 골목길, 그중에서도 윗동네로 골목의 계단을 한참 올라가면 남산과 동네가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동네 사람들이 위태위태하게 다니던 길과 옹벽, 그리고 계단이 있었다. 우리가 설계한 계단은 고립된 경사지와 기존 동네의 모호한 경계를 이어주고, 지붕과 골목의 연장이 되기도 하며 계단의 관습적 정의를 넘어선다. 

하지만 다양성이 존재하는 이태원의 흔한 계단 골목길에도 법규는 적용된다. 「건축법」에서 도로는 ‘보행과 자동차 통행이 가능한 너비 4m 이상의 도로’로 정의되며 대지는 도로에 2m 이상 접해야 한다. 도시와 건축물을 ‘사람’이 살아가는 바탕으로 보기보다 효율적인 차량 통행을 위한 기능적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서울의 오래된 경사지에서 살아온 주민들도 새로운 건축을 시도하기보다 대부분 ‘대규모 재개발’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우리는 이러한 고립된 경사 대지가 지속 가능하게 남아있을 수 있는 자생적인 방안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도시의 계단이 건축의 계단으로

처음 대지에 갔을 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대지인지 확인하기도 어려웠고, 도로와 단차가 있어서 윗길에서는 보이지도 않았다. 지적도로는 끊어져 있지만 경리단길의 동네 사람들은 우리 대지의 아슬아슬한 계단으로 통행하고 있었다. 기존 길을 오랫동안 주민들이 이용하고 있는 현황도로로 인정하고, 길의 중심에서 2m씩 밀어 4m를 확보해야 했다. 토지대장상 면적 100m2에서 옆집으로, 도로로, 가각전제로(사실 가각전제의 법 취지는 차량 통행을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30평 땅에 10평 남짓을 계단길로 내주고 나서 20평의 땅에 설계를 시작했다. 면적은 줄었지만 더더욱 ‘길’이 가진 가치에 집중했고 그것이 건축의 모든 해결책으로 작용했다. 

1층은 아랫길에서 진입하거나 윗길에서 한층 내려가 들어가고, 윗길에서는 바로 2층으로 연결되고 3층으로 올라가는 길이 열린다. 이곳은 삼거리 골목이었는데 이제 사거리가 되었다. 3층과 4층까지 이태원의 풍경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올라가고 4층에서는 남산의 풍경이 열리기 시작한다. 5층부터는 아랫길 더 먼 곳에서부터 길의 지층을 느낄 수 있도록 계단이 단면 방향으로 바뀐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 건물임에도 외부 계단은 심리적으로 더 낮게 느끼는 경향이 있어 층수를 잊어버리기도 한다. 

경리단길에서 이어진 도시의 골목 계단길은 건축의 계단길로 변화하며 길의 경계는 흐릿해진다. 이 경계는 어느 곳에서나 점차적이며 계단이 가지는 다양한 층위로 도시를 만난다. 민간 건축에서 스스로 만들어낸 계단의 변주가 곧 건축의 입면에서 도시의 입면으로 확장된다. 

 

 

 

외피의 두 얼굴

경리계단길의 외피는 거칠다. 예전 도시의 골목길 담장들도 거친 질감이 많다. 담장의 거친 질감을 대지 내로 끌어 쓰고 그 거친 질감의 콘크리트를 파헤치며 길을 내고 싶었다. 마치 장소의 부산물인 양, 지역성의 현재처럼 자연스러운 두 개의 질감을 대치시켰다. 

기술적으로는 좁은 길에서 가설공사를 하기도 어려웠고, 외줄 비계를 설치할 수밖에 없어 외벽에 디테일한 작업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경리계단길에는 거푸집만으로 패턴 작업을 할 수 있는 패턴 콘크리트를 써서 작업의 공정도 줄이고 안정성 또한 확보했다. 

건물 계단길 측면에는 테라코타 타일을 붙였다. 손에 닿는 곳은 조금 더 부드러운 느낌의 재료를 사용하고 싶었고, 만져도 괜찮고 청소도 용이한 자재를 찾았다. 테라코타 타일은 벽과 바닥에 같은 색상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게 생산되는 몇 안 되는 재료 중 하나다. 게다가 타일을 붙이는 면에서는 계단길 공간을 이용해 쌍줄 비계를 설치하고 붙임공정을 진행할 수 있었다. 구축과 재료 사용의 논리가 일치하는 순간이었다. 

 

동등한 창의 비례

경리계단길의 긴 세로 창은 정사각형의 창과 대비된다. 멀리서부터 보이는 계단길 쪽 입면에는 폭이 좁고 긴 창을, 차가 다니는 윗길과 만나는 입면에는 가로가 넓은 창을 구성해 길을 지나는 차량과 사람들이 마주하도록 했다. 세로로 길게 반복되는 창은 협소한 건물 내부에 기다란 그림자를 드리우고, 남산과 경리단길의 풍경을 들여온다. 건물 외부의 풍경이 내부와 긴밀하게 연결되며 공간이 연속되었으면 했다. 길가에 있는 여느 상점들처럼 외부의 풍경을 공유하며 협소한 내부를 극복하길 바랐다. 

 

Circulation diagram 

 

시공의 두려움 속 의외의 즐거움

협소하고 차가 닿지 않는 곳이라 공사계획을 세우고 견적을 내는 과정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가장 필요한 두 가지는 장비차량 위치를 정하고, 자재를 적재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윗길에서 누구의 것도 아닌 자투리땅을 발견하고 차량을 임시로 주차할 수 있는 크지 않은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대형 장비는 아니지만 소소하게 장비를 들고 옮길 정도는 되는 공간이 운 좋게 하나씩 확보되면서 공사는 천천히 진행되기 시작했다. 상상 속에서는 어려움이 많았지만, 막상 지어지는 걸 눈으로 보니 작업자들도 수월하게 현장을 오가기 시작하면서 시공에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어려운 땅일수록 구축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이 평범한 땅보다 훨씬 더 소중하다. 디테일과 구축, 한계와 실험에 대한 생각이 명료한 덩어리와 물성으로 도시에 확고하게 존재하는 것을 확인하게 되기 때문이다. 현장의 작업자들과 긴밀하게 소통하면서 지어낸 경리계단길은 따뜻하지만 낯설다. 이 결과물 앞에서 예상보다 많은 도시적, 건축적, 기술적인 질문을 계속할 수 있게 된 것 또한 예기치 못한 즐거움이다. 

 

예전 우리 도시의 건축물들은 숫자보다는 ‘골목 끝집’이나, ‘계단 위 붉은 대문집’처럼 그 특징적 모습으로 불렸다. 요즘의 주소나 층수, 호수 등에서 편리하게 쓰이는 숫자는 경리계단길 건물에서 난독을 불러온다. 이곳이 오래된 동네의 ‘계단 위 테라스 앞집’이나 ‘윗길에서 내려오면 처음 보이는 가게’처럼 풍경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계단은 끊임없는 탐구 대상이다. 사유와 공유 사이의 모호한 경계에서 우연한 만남을 촉발하며 도시로 뻗어나가는 파사드다. 경리계단길이 골목과 함께 천천히 오래오래 나이 들어가기를 바란다. ​ 

 

 

월간 「SPACE(공간)」 682호(2024년 09월호) 지면에서 더 많은 자료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SPACE, 스페이스,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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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

(주)요앞 건축사사무소(류인근, 김도란, 정상경)

설계담당

홍유진, 이창주, 김호성, 김가영, 박근영

위치

서울시 용산구 회나무로12길 3-17

용도

근린생활시설

대지면적

70.28m²

건축면적

41.41m²

연면적

140.14m²

규모

지상 5층

주차

설치 의무 면제

높이

17.48m

건폐율

58.92%

용적률

199.4%

구조

철근콘크리트조

외부마감

골패턴 콘크리트, 테라코타 타일

내부마감

수성페인트

구조설계

(주)한길구조엔지니어링

기계,전기설계

(주)지엠이엠씨

시공

(주)다우이엔씨건설

설계기간

2022. 6. ~ 2023. 3.

시공기간

2023. 3. ~ 8.

건축주

(주)에이앤에이(이미란)


류인근
류인근은 공간종합건축사사무소에서 2005년부터 9년간 실무 경험을 쌓고, 2013년 디자인밴드 요앞을 공동설립했다. 현재 (주)요앞 건축사사무소의 대표로 김도란, 정상경 소장과 함께 활동하고 있다. 서울특별시건축상, 한국건축가협회상, 농어촌건축대전 본상, 제주건축문화대상 등을 수상했고, 바다별, 선흘아이, 요앞 하얀집, 소요재, 청풍래고인(淸風來故人), 1×4 HOUSE, 안양관양 신혼부부형 행복주택, 화성진안 청년형 행복주택 등 작품을 이어나가고 있다.
김도란
김도란은 한양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공간종합건축사사무소에서 실무 경험을 쌓았다. 2012년 스튜디오 쁨을 거쳐 2013년 디자인밴드 요앞을 설립했다.
정상경
정상경은 한양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런던 예술대학교에서 인테리어 및 공간디자인 석사학위를 받았다. 공간종합건축사사무소, 영인아키텍츠 런던, MKPL 아키텍츠 싱가포르 등에서 경험을 쌓았다. 한양대학교 건축학과에서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며, 인천시, 서울시 공공건축가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