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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물 없는 기념관: 만경교회 순교기념관

아으베 아키텍쳐스+톤 건축사사무소

글
임우진
사진
박우정
자료제공
아으베 아키텍쳐스
진행
이소운 기자
background

「SPACE(공간)」 2026년 3월호 (통권 700호)

 

 

 

 

지워진 흔적 위로 세운 기억

전형적인 한국의 농촌 풍경이 펼쳐진 김제시 만경읍. 시간이 멈춘 듯한 시골 마을의 나지막한 언덕 위에 자리한 이 프로젝트는 한국전쟁 당시 희생된 목사 김종한과 만경교회 성도 15명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이다. 순교자들의 유품이나 자료 같은 물리적 흔적이 전무한 상황에서, 이 프로젝트는 ‘기억의 재현’이라는 근본적 문제를 안고 출발했다. 기억은 형체가 없고, 단일한 의미로 고정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체적인 형상의 재현 대신 공간의 감각과 분위기를 통해 역사를 마주하게 하는 방식을 택했다. 건물은 상하부 두 개의 외부 광장으로 단순하게 구성되며, 시간의 흐름 속에서 빛과 그림자를 통해 순교자들의 존재가 공간 안에서 드러나도록 계획되었다.

 

 

 

 

 

​빛과 그림자로 쓴 순교의 서사

기념관의 건축적 백미는 자오선에 정렬된 직육면체의 ‘순교광장’이다. 상부가 개방된 파티오 형태의 이 광장은 태양의 궤적에 따라 작동하는 시간 장치로, 부지의 위도인 북위 36.5°에 맞춰 정밀하게 배치되었다. 보이드 상부에는 십자 형강이 설치되어 있으며, 그 위에 재불 작가 심지연이 순교자 15인을 형상화한 금속 조각이 배치되어 있다. 태양의 고도와 계절 변화에 따라 15인의 그림자는 벽면에 드러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특히 남중고도가 가장 높은 하지 정오에는 순교자의 실루엣이 방문자의 눈높이에 실물 크기로 맺힌다. 박제된 동상과 달리 이 그림자는 ‘하늘이 허락할 때’ 한시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며, 공간에 영적 존재감과 상징적 울림을 부여한다.

 

 

 

 

 

​물성의 대비

순교광장은 순교자의 유해가 발견된 우물과 방공호를 오마주한 것으로, 건축적 개입은 극도로 절제되었다. 공공 발주의 제한된 예산 안에서 선택된 재료들은 그 자체의 물성만으로 의미를 전달한다. 송판 거푸집의 흔적이 남은 노출콘크리트 외벽은 지하에서 발굴된 방공호처럼 거칠고 투박하다. 이는 구축의 과정과 인간의 노고를 촉각적으로 연결하며, 시간의 흐름을 받아들이는 그릇이 된다.

반면 순교광장 내부는 전혀 다른 감각으로 전환된다. 우물 내부를 상징하는 순교광장의 바닥과 벽면은 순백의 회벽과 우레탄 도장으로 마감되었다. 자연광이 과도하게 반사되고 확산되며 발생하는 현휘 효과는 방문객에게 시각적 충격과 함께 정화의 경험을 선사한다. 여기에 이탈리아 조각가 이냐치오 캄파냐의 백색 콘크리트 조각이 더해지며 공간의 신비감은 정점에 달한다.

 

 

 

 

 

​​마을 속에서 이어지는 기억

이 프로젝트에 대한 지자체의 공식적인 지원 명목은 지역 활성화였다. 눈에 띄는 랜드마크 하나가 외지인의 방문을 유도해 도시를 소생시킬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이 프로젝트에서 우리는 건축을 통해 지역의 정체성을 단정하기보다, 그것이 형성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빛과 그림자’라는 주제를 채택한 데에는 방문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려는 목적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내겠다는 바람이 있었다. 우리는 공사 기간 동안 지역의 작가들에게 순교자의 그림자를 주제로 한 작업을 권유했다. 비극적 사건을 직접 재현하기보다 그림자라는 간접적인 형상을 매개로 삼는다면 주민 각자의 해석과 표현을 수용할 여지가 있어 앞으로 마을의 문화적 코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구 교회당과 지하에 위치한 순교광장 사이에는 지역 주민과 방문객을 위한 ‘나눔의 광장’이 마련되어 있다. 툇마루로 둘러싸인 한옥의 안마당과 이탈리아의 작은 도심 광장을 동시에 연상시키는 열린 공간이다. 개막식 날, 나눔의 광장에는 그동안 주민 작가들이 작업한 작품들이 걸렸고, 순교자의 실루엣은 기념품으로 재탄생해 방문객들의 흥미를 끌었다. 나눔의 광장에 ‘생명의 나무’ 상을 설치한 조각가 안드레아 로지는 그 자리에서 작품 여러 점을 구입하기도 했다. 건축가의 개입과 소통이 준공 이후의 사용과 참여를 끌어내는 계기로도 작동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다. 앞으로 주민들의 관심과 노력이 축적되며 ‘그림자 마을’이라는 고유의 정체성으로 자리 잡게 될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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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SPACE(공간)」 700호(2026년 03월호) 지면에서 더 많은 자료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SPACE, 스페이스,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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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

아으베 아키텍쳐스(임우진, 곽윤석)+ 톤 건축사사무소(이윤희)

설계담당

유정임

위치

전라북도 김제시 만경읍 만경리 276-3

용도

문화 및 집회시설

대지면적

389㎡

건축면적

131.44㎡

연면적

95.43㎡

규모

지상 1층, 지하 1층

높이

10m

건폐율

38.79%

용적률

24.53%

구조

철근콘크리트조

외부마감

송판거푸집 노출콘크리트, 스토

내부마감

수성페인트

구조설계

푸른구조기술사사무소

기계,전기설계

익스플래니트

시공

서진종합개발

설계기간

2022. 11. ~ 2023. 12.

시공기간

2024. 9. ~ 2025. 10.

공사비

10억 원

건축주

김제 만경교회


임우진
임우진은 프랑스 정부공인 건축가(DPLG)로, 지난 25년간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해왔다. 만경교회 순교기념관은 2017년 고성 주택 인화이트 이후 그의 두 번째 한국 실현작이다. 그는 기술과 예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과감하면서도 섬세한 실험을 통해 건축의 새로운 가능성을 꾸준히 탐구하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피렌체 국제현대미술비엔날레에서 디자인 부분 대상인 레오나르도 다빈치 상을 2회 연속 수상하며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또한 건축의 문턱을 낮추고 대중과 소통하기 위해 칼럼 등 다양한 저작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보이지 않는 도시』(2022)가 있다.